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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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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백년 전쟁 ( 百年戰爭 )

프랑스의 왕위 계승과 영토 문제 등이 원인이 되어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백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영토 문제와 왕위 계승 문제로 치열하게 싸운 전쟁이다. 이 전쟁은 프랑스를 전쟁터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백년 전쟁의 원인

중세에는 어떤 왕이 자신의 왕국 밖에서 작위를 상속하면 다른 왕의 봉신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1066년 노르만 왕조 성립 이후 프랑스 영토 내에 많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역대 프랑스 왕들은 이를 회복하려고 하여 양국 사이에는 언제나 전쟁과 대립이 계속되었다. 특히 기옌(현재 가스코뉴) 지방과 플랑드르는 분쟁의 씨앗이었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기옌(프랑스 남서부) 공작이자 퐁티외 백작이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점을 들어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즉각 반발하였고, 두 나라의  대립이 깊어졌다. 

 


백년 전쟁의 전개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은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 지대로 프랑스가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 공급을 중단하였다. 이에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그 보복으로 당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영국군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여 파리를 향해 진격하였다.  

 

두 나라 군사는 1346년 크레시 평원에서 대접전을 벌였고, 영국군은 크레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군은 그 기세를 몰아 칼레 시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칼레 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 1347년 걸국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그 뒤 두 나라에 흑사병이 유행한 데다 재정 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었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하였다.


△푸아티에 전투: 1356년 9월 19일 프랑스의 장2세는 영국보다 우세한 전력을 보유고도 참패를 당하였다. 프랑스의 기사들은 늪지의 수렁에 빠져 꼼짝못한 채 영국 흑태자군 궁수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장 2세 자신도 프랑스군의 마지막 돌격을 지휘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흑태자가 다시 남프랑스를 침입하였다. 흑태자는 1356년 9월 19일 장 2세가 이끈 프랑스군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당시 자크리의 난 등 국내 문제로 궁지에 빠진 프랑스는 결국 1360년 영국과 브레트니- 칼레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아키텐과 가스코뉴 등 서부 프랑스의 3분의 1을 영국에 할양하였다.

 

그러나 조약의 조항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장 2세가 감금 도중 죽었고, 그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샤를 5세는 조약 준수를 거부해 다시 분쟁이 일어났다. 1377년 영국은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고, 프랑스는 1380년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1380년 이후 두 나라는 각각 내부의 권력다툼에 휩싸여 잠시 전쟁이 중단되었으나, 플랑드르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리처드 2세가 결국 폐위당하고(1399), 그의 사촌인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프랑스에서는 정신병 발작으로 통치를 못하게 된 샤를 6세 대신 실권을 차지하기 위해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전 상태에 이르렀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영국군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크게 물리쳐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빼앗았다. 헨리 5세는 이를 계기로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임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1428년 영국군은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함으로써,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1429년 잔 다르크의 구원병이 영국군의 오를레앙 포위를 풀게 함으로써 전황은 프랑스의 승리로 전환되었다.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적법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430년 부르고뉴파에게 붙잡힌 잔 다르크는 영국 측에 인도되어 이단죄로 재판을 받은 후 1431년 화형당하였다.

 

이후 샤를 7세는 영국의 왕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장미 전쟁을 틈타 노르망디를 정복하고, 1453년까지 아키텐 전역을 점령하였다. 1453년 보르도 함락을 끝으로 백년 전쟁은 끝났고,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칼레는 1558년에 프랑스로 넘어갔다.



백년 전쟁의 영향

백년 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 기사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 해방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중앙 집권 국가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 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 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제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장미 전쟁(1455~1485)이 일어났으나, 이는 귀족 세력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와, 헨리 7세에 의한 중앙 집권화의 기초을 굳혀 주었다. 또한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 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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