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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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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안중근 ( 安重根; 1879 ~ 1910)

1907년 이전에는 교육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뒤 연해주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되어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서당에사 한학을 배웠으나, 사냥하기를 좋아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곧 아버지의 죽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1906년 삼흥 학교를 설립하고, 돈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 신협약 체결, 군대 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특별자치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9년 3월 5일 안중근은 생사를 같이하며 구국 운동에 투신하는 동지 11명과 단지 동맹을 결행하고 ‘조국 독립 회복과 동양 평화 유지’를 위하는 목적으로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의병 출신으로, 20대 중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날 12명의 회원들은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쓴 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안중근의 약지가 잘린 수형(手形)은 이때 단지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1909년 가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북만주 시찰을 목적으로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의 초대 통감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 의장이 된 침략의 우두머리였다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는 7인 동맹을 맺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다. 1909년 10월 21일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고, 도중에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하를 통역으로 삼았으며, 도착 후 조도선이 합류하였다.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여러 신문을 모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도착하는 시간과 환영 행사 등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탕탕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려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인파 족으로 가는 순간, 안중근은 재빨리 권총을 꺼내 히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을 쏘았다. 그리고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쏘았을 것에 대비해 다시 일행을 향해  세 발을 더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곧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후 사망하였고, 그를 따르던 일본 관료도 중경상을 입었다.


안중근은 즉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그날 오후 하얼빈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겨져 조사를 받았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는 검찰관의 질문에 그 죄목을 15가지로 나누어 대답하였다. 안중근은 1차 조사가 끝난 뒤 11월 3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뤼순 형무소롤 옮겨졌다. 안중근은 재판 중에도 "나는 이번 거사를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 독립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국가와 동양 평화를 위해 감행하였다. 따라서 사사로운 원한으로 저지른 개인 범죄가 아니므로 나를 전쟁 포로로 대우해주기 바란다."라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 순국 직전 안정근과 안공근 두 동생에게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그러나 일본 정부의 강압에 의해 공판 시작 1주일 만에 모든 재판이 끝나 버렸고,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죽음을 앞둔 안중근은 감방 안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필에 몰두하여 자서전과  미완성인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 며칠 전 동생들에게 "우리나라가 국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내 시신을 조국에 가져가 장례지내지 말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한 살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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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인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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