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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나눔 · 소통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드레퓌스 사건 (Dreyfus, A. )

유대 인인 프랑스 포병 대위인 드레퓌스를 둘러싼 정치적 사건으로, 그는 간첩 혐의를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풀려났다.



체포된 드레퓌스

1894년 12월 22일, 드레퓌스는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 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드레퓌스가 간첩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파리 소재의 독일 대사관에서 가져온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와 유사하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간첩 혐의를 받은 데에는 유대 인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드레퓌스는 ‘악마의 섬’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유배당했다. 그 섬에는 간수를 제외하고는 오직 그밖에 없었다.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다

드레퓌스 가족은 무죄를 주장하였고, 이 사건은 언론과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군의 피카르 중령은  정보를 판 사람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를 찾았지만, 군은 중령의 입을 막고 사실대로 발표하지 않고 사건을 덮으려고 하였다. 오히려 군사 법원은 진짜 범인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지식인들이 결집하였다. 이후 프랑스 사회는 정의와 진실, 인권을 주장하는 드레퓌스 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주장하는 반 드레퓌스 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반 드레퓌스 파는 반(反)유대주의와 불관용으로 일관하며 드레퓌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관용과 정의의 상징이 된 드레퓌스 사건

1898년 군은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였지만 곧 조작임이 밝혀졌지만 군사 법원은 1899년에 드레퓌스가 유죄임을 다시 선고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를 사면하였고, 1906년에 드레퓌스는 법정 투쟁을 계속한 끝에 무죄 판결을 받고 복직할 수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후 불관용, 증오와 싸우는 관용과 정의의 상징이 되었다.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은 드레퓌스 무죄 판결 100년을 기념한 연설에서 “불관용과 증오에 대한 싸움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드레퓌스 사건을 되새기며 항상 경계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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