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교과 설정

마이허브 > 교과에도 반영 됩니다.

  • 국어
  • 영어
  • 수학
  • 과학
  • 사회
  • 지리
  • 역사
  • 도덕
  • 기술·가정
  • 정보
  • 음악
  • 미술
  • 체육
  • 연극
  • 한문
닫기
닫기

사이트맵

닫기

중등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나눔 · 소통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덕수궁 석조전 ( 德壽宮石造殿)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석조 건물로 1910년 준공되었다. 외국 손님의 접대 장소였던 석조전은 광복 후에는 미ㆍ소 공동 회담 장소로 쓰였고, 6ㆍ25 전쟁 이후 1972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후 선조가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불렸다.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그해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1611년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이름 지었다. 경운궁은 1897년 고종이 아관 파천 후 이곳으로 환궁하면서 궁궐다운 여러 전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1906년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순종은 창덕궁으로 왕궁을 옮겼고, 그 후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궁이라 불렸다.

 

덕수궁 석조전은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J.M. 브라운의 발의에 의해 1900년 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하였다. 기본 설계는 1898년경 영국인 J. R. 하딩이 하였고,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다. 공사 감독은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 영국인 데이비슨 등이 하였다. 건물 양식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따랐다. 석조전의 이름은 건물 외관이 석조라서 붙은 이름이다. 준공 후 이 건물은 명동성당, YMCA 건물과 함께 함께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혔다.

 

△ 덕수궁 석조전 전경(1918년경)


덕수궁 석조전은 원래 고종 황제가 집무실과 외국 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었는데, 1층에서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하였다. 석조전은 주로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기거했으며, 고종은 1919년 1월 승하할 때까지 집무실과 알현실로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덕수궁 석조전은 일제 강점기 때 전시장으로 전락하였다. 1922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이어 1933년 일제는 석조전 개조 공사를 진행하면서 알현실 등 내부 시설을 모두 철거하였다. 광복 후 1946년~1948년까지 미·소 공동 위원회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1948년~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엔 한국 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내부가 크게 훼손되었고, 1955년 육군 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석조전 옆에 세워진 별관은 1936년 착공하여 1938년에 준공되어 이왕가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1946년 이왕가박물관이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되었고, 1954년 석조전이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69년 덕수궁미술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통합, 개편되면서 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은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현재 별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2008년부터 원형 복원을 결정하였는데, 공사 중 건물 내부 벽체에서 건립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실별 규모와 벽체 위치, 아치형 개구부(開口部) 위치와 형태, 벽난로와 연도(煙道)의 위치 등이 발견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변형된 석조전을 관계 전문가의 의견과 고증 자료를 토대로 복원하고 가구 등 당시 생활상을 재현하기로 하였다. 문화재청은 대한 제국의 목적을 살려 대한 제국 역사관(가칭)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2013년 완공하였다.

 

30
8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