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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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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청계천 복개 도로 개통

1958년부터 시작된 4년간의 청계천 복개 공사가 1961년 12월 5일 마무리되어, 한때는 풍류와 세시풍속의 현장이자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복개 전에는 불결과 악취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청계천이 철근 콘크리트 밑으로 사라졌다.

청계천(淸溪川)은 서울특별시 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에서 흘러든 물이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을 거치며 중랑천과 합류한 뒤 한강으로 흘러드는 마른 하천이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본래의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이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 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 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청계천 복개 시도는 1905년 광장회사가 광교에서 장교까지 복개해 시장 부지를 마련하려 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1926년 예종석, 오무라 햐쿠조 등이 주식회사 순목회를 발기하고 서울 청계천 광교에서부터 동쪽으로 1㎞ 정도 구간을 복개해 그 위에 각종 오락 시설과 흥행장을 건설하겠다고 조선총독부에 허가원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호우 시 배수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 계획을 불허하였다.


◀ 청개천 복개 공사 현장(*)


1930년대 중반부터 청계천 복개 요구가 높아갔고, 이 무렵 경성부민의 전염병 이환율이 높아 총독부에서도 그 주원인이 불결한 청계천에 있다고 인정하였다. 또 청계천 주변 도로가 좁은 데다 안전 장치도 없어 매년 여러 명이 추락사하곤 하였다. 1935년 말 경성부에서는 청계천을 전면 복개해 도로로 삼고 그 위에 다시 고가 철도를 놓는다는 구상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사는 광복 이후인 1958년에 시작되어 1967년까지 지속되었다.


청계천은 서울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생활 오폐수가 흘러 냄새가 진동하는 오계천(汚溪川)으로 전락하였다. 무허가 판자촌이 빽빽이 들어차 도시 미관도 말이 아니었다. 1958년 6월 청계천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61년 12월 5일 완공되고 오간수교에서 청계천 복개 도로 개통식을 가졌다. 복개된 곳은 광교와 오간수교(동대문 부근)까지의 2,359m 구간으로, 복개와 함께 광교, 수표교, 관수교, 방산교, 오간수교 5개 돌다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후로도 마장동 철교까지 복개가 연장되어, 그 위에 들어선 3·1 고가도로는 현대적인 서울의 상징물이 되었다.


청계천을 복개하면 서울은 곧 깨끗해질 줄 알았지만 이후 그 자리에는 소음과 무질서, 쓰레기가 대신하였다. 이에 다시 복원 사업을 추진하여 복개 도로와 고가도로는 2003년 철거 공사로 사라졌다. 2005년에 완료된 그 자리에는 옛 청계천을 모델로 한 새로운 하천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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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진은 서울사진아카이브(http://photoarchives.seoul.go.kr)이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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