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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나눔 · 소통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13도 창의군

1908년 12월 6일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13도 창의군이 결성되고,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군에 패배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으로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군대가 해산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 운동에 합류하였고,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의 대일 항쟁이 격렬해졌다. 이 무렵 여러 지역에 의병 활동이 산개됨에 따라 이들 의병을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을미의병 이후 경북 문경에 은거하던 이인영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에서 의병군을 모아 활동하던 이은찬, 이구재 등의 추대로 관동 창의 대장을 맡으며 다시 격문을 뿌리고 거병하였다.


이인영은 이은찬의 의병 부대를 원주를 거점으로 하는 관동 창의 부대로 개칭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각 도의 의병 부대에 격문을 보내 11월에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모인 각 도의 의병 부대는 이인영을 13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13도 연합 부대(13도 창의군)를 편성하였다.



의병 연합 부대는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을 허위로 하고, 각 지역의 의병 대장으로 관동 민긍호, 호서 이강년, 교남 박정빈, 경기도·황해도 권중희, 관서 방인관, 관북 정봉준, 호남 문태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이때 참여한 의병의 총병력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신식 소총을 가진 3,000여 명의 해산 군인도 포함되어 있어서 의병 운동 사상 가장 크고 강력한 의병군이었다. 하지만 신돌석, 홍범도, 김수민 등 평민 출신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는 제외되었다. 이는 이후 의병 부대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지 못하고, 전략적으로도 투쟁성과 기동 전술이 미비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허위(*)


1908년 의병 연합 부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각국 공사관에 의병 부대를 국제 공법상의 전쟁 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보냈다. 그리고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3백 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퇴각하였다. 


더욱이 이때 부친 사망 소식을 받은 총대장 이인영은 지휘권을 허위에게 맡기고 귀향해버렸다. 이후 의병들이 여러 차례 이인영을 찾아가귀를 권유하였으나 아버지 3년상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 서울 진공에 실패하고 총대장이 없는 연합군은 다시 전국으로 흩어졌다. 결국 1908년 2월에 해산한 이후 13도 창의군은 각기 근거지로 돌아가 개별적인 의병 활동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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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진은 독립기념관이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보도자료 '2004년도 1월의 독립운동가 왕산(旺山) 허 위(許蔿) 선생'을 이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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