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교과 설정

마이허브 > 교과에도 반영 됩니다.

  • 국어
  • 영어
  • 수학
  • 과학
  • 사회
  • 지리
  • 역사
  • 도덕
  • 기술·가정
  • 정보
  • 음악
  • 미술
  • 체육
  • 연극
  • 한문
닫기
닫기

사이트맵

닫기

중등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나눔 · 소통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일 선전 포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1941년 12월 10일 대일 선전 포고와 성명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출범하였다. 3·1 운동으로 본격화된 대한 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이를 확대해 나가기 위한 정부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임시 정부는 일제의 중국 침탈이 가속화된 1930년대 들어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를 시작으로 난징, 광저우 등을 거쳐 1940년 중국 내륙인 쓰촨 성 충칭에 자리를 잡았다.


충칭으로 옮긴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체제를 정비하고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1940년에는 중국 본토로 이동해 온 독립군을 바탕으로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무장 세력이 편입되었다. 또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한국 청년들도 합류하였다. 이에 한국광복군은 출범 당시 부대원이 30여 명에 불과하였지만,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과 중국 국민당의 군사 원조를 받아 체계를 갖추어 갔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1년 12월 9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선전 포고는 무장 병력을 갖춘 한국광복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대일 선전 포고는 국권 회복을 위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결의를 세계만방에 천명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응징하기 위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제사회의 구성원임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43년 8월 13일에는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서 9명의 한국광복군 공작대가 연합군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 5월부터는 미국 전략 정보 기구(OSS)와 합작해 유격전 특수 훈련을 받으며, 국내에 진입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진공 작전은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김구 주석은 그 실망감을 백범일지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기록하였다.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는 1951년 9월, 48개국 연합국과 일본 간 강화 조약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선전 포고를 근거로 “우리도 연합국 일원으로 조인에 참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을 만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인 참여는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현재 타이완 정부가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 대일 선전 포고 원본에는 포고 일자가 12월 10일이어서 지금까지 9일과 10일 양론이 분분하지만, 한국광복군 동지회는 해마다 12월 9일을 기념하고 있다.

---------------------------------------------------------------------------------

* 본 게시물의 그림은 독립기념관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웹툰으로 보는 독립운동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용하였습니다.

27
28
29
3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