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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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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바이런 (Byron, George Gordon, 1788~1824 )

1788년 1월 22일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태어났다. 그는 셸리, 키츠와 함께 세계적인 낭만파 시인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과 "돈 주안"이 있다.


바이런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으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시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인입니다. 그는 “잠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라는 말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바이런의 전기를 쓴 토마스 메드윈은 바이런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그의 얼굴은 그리스 조각처럼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그의 이마는 높고 관자놀이는 넓으며 윤곽선이 분명한 입술과 턱을 지녔다. 달빛 같은  창백한 피부에 회색빛 감도는 갈색 눈빛은 유난히 투명하며……상대방의 생각을 꿰?는 것처럼 안으로 파고드는 불길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치아는 작고 희다.”


바이런은 1788년 1월 22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였으며,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휘어 있었습니다.  ‘미치광이 존’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방탕한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방랑하다가 죽자, 바이런은 어머니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항구 도시 애버딘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1798년 큰아버지 바이런 경의 칭호와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노팅엄셔의 낡은 뉴스테드 애비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바이런은 1799년 런던에 올라와 예비 칼리지를 거쳐 1801년 해로 스쿨에 입학하였으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름거리기는 하였지만 수영과 크리켓도 잘 하였습니다.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 시집 ‘게으른 나날’(1807)을 출판하였습니다. 트리니티로 돌아와 존 캠 호브하우스와 밀접한 교류를 하게 되면서 진보적인 휘그파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09년 1월에 상원의원이 되었고, 익명으로 풍자시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를 출판하였습니다. 그 후 친구 합하우스와 긴 여행길에 올라, 배로 리스본에 가서 에스파냐를 횡단하여 몰타 섬을 거쳐 아테네와 마라톤 등 내륙 여행을 계속하면서 장편서사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2년 남짓한 긴 여행을 끝마치고 1811년에 귀국하였습니다.

 

1812년 2월 상원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하였고, 3월 초에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1권, 2권)을 출판하여 유명해졌습니다. 책을 출간한 그날 1쇄 500부가 곧바로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시의 선정성뿐만 아니라 그의 신상에 관한 괴소문과 그의 뛰어난 외모도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데 커다란 몫을 하였습니다. 그 후 “아바이도스의 신부”(1813), “해적”(1814), “라라”(1814) 등을 잇달아 출판하였고, 천재 시인, 젊은미남 독신 귀족이라 하여 런던 사교계의 총아로 등장하였습니다. 1815년 애너벨러 밀뱅크와 결혼하였으며, “헤브라이 영창(詠唱)”(1815), “파리지나‘(1816), ”코린트의 포위“(1816)를 출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이혼한 뒤 고국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계속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3권, 1816), “실롱의 죄수”(1816)를 썼고, 이후 “타소의 비탄”(1817) “베포”(1818),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4권, 1818)을 비롯하여 대작(大作) “돈 주안”(1819∼1823)에 착수하였습니다. “돈 주안”을 계속 쓰면서 “단테의 예언”(1821)과 4편의 시극 “마리노 팔리에로”(1820), “카인‘(1821), “포스카리 2대”(1821), “사르다나팔루스”(1821)를 썼습니다. 


바이런은 1823년 런던의 그리스 위원회로부터 터키에 대항해서 독립 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돕는 요원으로서 활동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이런은 제노바를 떠나 그리스로 갔고, 그리스 부대의 지도자인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 왕자와 합류하려고 메솔롱기온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리스 독립운동에 매우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1824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그리스 전체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며,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시신은 영국으로 옮겨졌으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안치가 거부되어 뉴스테드 근처에 있는 집안 납골당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145년이 지난 1969년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