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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나눔 · 소통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Franz Joseph Haydn; 1732~1809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18세기 후반 고전파의 중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며,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여 곡의 교향곡과 70여 곡에 달하는 현악 4중주곡을 썼으며, 34곡의 오페라, 4곡의 오라토리오, 50여 곡의 클라비어 소나타 등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하이든의 생애와 작품 활동 

하이든은 1732년 오스트리아 동부의 로라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 친척이 사는 하인부르크로 가서 음악의 기초 수업을 받으면서 '노래 잘하는 아이'로 알려졌다. 1740년 빈의 성 스테파노 대성당 소년합창대(현재 빈 소년합창단)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에서 나왔다. 


그때부터 20대 후반에 이를 때까지, 하이든은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연주하거나 귀족의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였고, 작곡을 독학으로 습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1760년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라와 결혼하였다. 1761년 하이든은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의 부악장에 취임하였고, 악장이 사망한 1766년부터는 악장으로 승진하여, 그곳에서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음악가들은 귀족의 후원으로 생활하거나, 아예 귀족 가문에 속해 있는 전속 음악가로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많은 교향곡, 현악 4중주곡, 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서 고전 시대 음악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였다. 1781년에는 소나타 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프러시안 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기도 하다.

1780년대에는 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 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 교향곡’(2곡) ‘도니 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그가 쓴 교향곡 중에는 ‘고별’, ‘사냥’, ‘옥스퍼드’, ‘놀람’, ‘군대’, ‘시계’, ‘큰북연타’, ‘런던’ 등의 이름이 붙은 것이 있다.


1790년 니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 악장이라는 칭호를 받고 그 직에서 물러나 노년을 빈에서 보냈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 D. 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 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 음악 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 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에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이후 하이든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와  친교가 있었는데, 첫 번째 영국 체류 중이던 1791년에 모차르트는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가던 1792년 본에 들렀던 하이든은 거기서 처음으로 젊은 베토벤을 만났으며, 그 후 잠시 빈에서 그에게 잠시 음악을 지도하였고 베토벤이 왕성한 작곡 활동을 하게 될 무렵에는 은퇴하여 여생을 즐겼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빈을 두 번째 공격하는 포성을 들으며 1809년 5월 31일 7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바로크, 고전파, 낭만주의 음악가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고 한다.



하이든의 두개골 도난 사건

하이든은 죽어서 골상학이라는 사이비 과학의 피해자가 되었다. 골상학은 인간의 두개골을 연구하는 분야인데, 두개골의 생물학적 연구라기보다는 해골의 형태가 인간의 마음, 능력을 결정짓는다고 보는 일종의 사이비 과학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인간의 행동은 철학이나 종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골상의 형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골상학이 유행하였다. 이로 인해 하이든은 사망 후 머리 부분을 도난당하였다.

 

하이든의 장례식을 치른 지 11년이 지난 1820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 2세는 하이든의 유해를 자신의 가족묘로 옮기려 하였다. 그런데 이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이든의 머리가 사라진 사실을 알고 조사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골상학 연구에 빠져 있던 로젠바움과 페테르라는 두 사람이 하이든의 천재적 작곡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하이든의 무덤에서 두개골을 훔쳐 골상학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하이든의 두개골을 훔친 두 사람은 니콜라우스 2세에게 큰돈을 받고 두개골을 돌려주었는데, 그것은 하이든의 두개골이 아님이 페테르의 유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범인들은 하이든의 두개골을 몰래 숨긴 뒤 이를 빈의 음악 애호가 협회에 기증할 것을 당부하고 모두 사망하였다. 그 후로 두개골을 찾는 활동을 계속 진행하여 우여곡절 끝에 사망한 지 145년이 흐른 1954년에 반환되어 다른 유골과 함께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가짜 두개골도 그대로 남아 있어 하이든의 유골은 두 개의 두개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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