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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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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6·3 시위(6·3 항쟁)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의 한·일 회담에 반대하여 학생과 시민이 일으킨 항쟁이다.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한·일 국교 정상 회담 반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광복 이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일은 한국의 중요한 외교 과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 질서 개편과 식민지 청산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결합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되자 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한·미·일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산주의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와 그에 따른 배상 문제를 덮어두고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진행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추진되어 양국은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지만, 그때마다 재산 청구권 문제, 평화선 문제 등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지지와 경제 발전이 절실하였다. 이에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서둘러 경제 발전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미국도 한·미·일 3각 안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요구하였으므로 정부는 한·일 회담을 추진하였다. 


1964년 3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한·일 회담 일정에 합의하였다. 다음날인 24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한·일 회담 반대 투쟁에 돌입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회담 유보를 결정하였지만, 일시적 조치에 불과하였다. 
한·일 회담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무 장관 오히라 간에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협상 타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던 청구권 문제가 ‘독립 축하금’ 명목의 후원금과 차관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타결됨으로써 회담의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회담 과정에서 일본의 사과와 배상, 약탈 국가유산 반환 등이 외면된 사실이 드러나자, 학생과 시민들은 이를 굴욕적인 외교라고 비난하며 한·일 회담 반대 투쟁이 점차 확대되었다. 1964년 5월 20일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학생 총연합회는 박정희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장례식을 서울대 문리대에서 거행하였다. 여기에서 낭독한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조사는 시인 김지하가 작성한 것이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1964. 5. 20.)


학생과 시민의 반대 시위는 6월 3일 절정에 이르렀다. 서울의 주요 대학교 학생 1만여 명과 시민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대학생들은 청와대 길목까지 진입해 ‘굴욕적 대일 외교 반대’, ‘불법적 친일 정권 퇴진’ 등을 외쳤다. 박정희 정부는 서울 전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무력 진압하였다. 같은 해 7월 29일 계엄을 해제할 때까지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대학 휴교와 언론·출판의 사전 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 ·체포·구금, 통행 금지 시간 연장 조치가 내려졌다. 이 조치로 시위의 주동 인물과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이 검거되거나 구속되었다.

 

한·일 국교 수립을 추진한 박정희 정부는 6·3 시위가 일어난 지 1년 만인 1965년 6월 22일 굴욕적인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부는 일본에서 경제 개발 자금을 받아냈지만, 국민이 원하였던 일본의 공식 사과를 끌어내지 못하였다. 그 결과 식민지 시기 피해를 입은 개인의 배상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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