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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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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휴전 협정 체결

휴전 협정은 군사 분계선 설정, 포로 송환 문제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2년여 동안 계속되다가,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되었다.

6·25 전쟁이 국제전의 양상을 띠자, 세계 여러 나라는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였다. 전쟁에 적극적이던 미국도 전선을 만주까지 확대하자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를 해임하고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하였다. 마침내 1951년 6월 하순 소련이 유엔을 통해 휴전 협상을 제안하였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유엔군과, 북한군, 중국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휴전에 반대하였으나 협상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휴전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군사 분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포로 송환 문제 등으로 회담 당사자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여 타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종전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소련 측은 부상병 포로 우선 교환에 합의해 왔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휴전 협정 후에도 한국을 계속 방위하겠다고 언급하면서 협상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4월 12일 성명을 통해 휴전 반대 단독 북진을 주장하였고, 국회도 4월 21일 북진 통일을 결의하였다. 6월 8일 포로 교환 협정이 체결되자 9일부터 전국적으로 시위가 잇달아 발생하였고, 이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석방하였다. 6월 22일 대통령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회담을 갖고 한국 정부의 휴전 협정 동의 조건으로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중국군 즉시 철수, 제네바 정치 회담의 시한 설정 등 3개항을 제시하였다.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로버트 특사를 한국으로 보내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연내에 체결한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7월 24일 휴전 협정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휴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유엔군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테이블)과 남일 북한 인민군 대표(오른쪽 테이블)가 서명하고 있다. 이들의 서명 뒤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국 펑더화이, 북한 김일성이 후방에서 각각 연서하였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휴전 협정 당시의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기로 정함에 따라 38도선 부근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결국 휴전 협정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3년 1개월, 휴전 협상 개시 2년여 만인 1953년 7월 27일 조인되었다. 이때에 결정된 휴전선은 오늘날까지 남과 북을 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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