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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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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계몽주의자 볼테르 사망 (Voltaire, 1694~1778 )

관용을 외친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가 1778년 5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두 차례의 감옥행, 그리고 성공

볼테르의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이다. 그는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예수회 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 공부를 하였지만 그보다는 문학에 관심을 두었다. 사교적이어서 살롱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는 것을 즐기기도 하였다. 볼테르는 1717년, 루이 14세의 사후에 섭정으로 있던 오를레앙 공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감옥에서 쓴 희곡으로 명성을 얻었다.


볼테르는 그의 명성과 교만을 못마땅해 한 한 귀족과 말다툼을 벌이다 그의 하인에게 몰매를 맞고, 귀족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다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있겠다는 조건으로 풀려난 뒤 영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오늘날까지 “걸리버 여행기”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를 만나는 등 많은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프랑스에 돌아온 뒤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아 출세하였으나 시기하는 이들이 많아 프로이센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다시 스위스로 옮겼다. ‘백과전서*’의 여러 항목을 이때 편찬하였다.


*백과전서: 1751~1781년까지 전 30권(본문 19권, 도판 11권)으로 간행된 백과사전. 프랑스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저술로 평가되며 여러 차례 금서로 지정되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로 편찬을 이끌었으며, 루소와 몽테스키외 등이 항목별로 공동 집필했다. 볼테르도 이 가운데 여러 항목을 기고했다.


장 칼라스 사건과 관용

오늘날 사람들이 기억하는 관용의 상징으로서의 볼테르를 만들어낸 사건이 있었다. 1762년 구교의 세력이 강한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개신교 가정의 청년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행했다. 마르크 앙투안이라는 이 청년은 신교도이기에 구교가 강한 이곳에서 자신의 꿈(변호사)을 접어야 할 처지에 놓였는데, 이를 비관하고 자살한 것이다. 그러나 앙투안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다 가족에게 살해됐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 소문으로 그의 아버지 장 칼라스와 가족 모두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조사 끝에 타살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고, 가족 모두가 혐의를 부인했지만, 장 칼라스는 수레바퀴에 매달아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볼테르는 이 사건을 듣고 분개하여 재판이 부당하다는 전단을 만들고 동료 작가, 학자들의 지지를 끌어내어 사건의 재심 여론을 조성하였다. “그는 고귀한 생명을 얼마나 죽여야 광신의 수레바퀴를 멈출까? 순교자를 얼마나 더 만들어야 역사를 조작하는 짓을 그만둘까? 이런 물음에 답하면서 사람들을 단죄하는 어둠의 세력에게 뉘우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전쟁을 부르는 것은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톨레랑스(관용)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그리고 장 칼라스가 죽은 지 3년 만에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가 이 사건에 대해 쓴 책이 “관용론”이다.


그가 말했다고 알려진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라는 말은, 실제로 그가 한 말은 아니다. 후대에 어느 작가가 볼테르에 관한 책에서 쓴 내용이 마치 볼테르가 한 말처럼 계속해서 잘못 인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볼테르의 관용에 대한 생각을 잘 담고 있다. 그는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의 억울함을 위해,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여론을 조성하였고 결국 무죄를 끌어냈다.


볼테르는 프랑스 정부와 갈등하며 스위스에 있다가, 루이 15세가 사망한 이듬해 1778년 초에 파리로 돌아왔고, 그해 5월 30일 84세로 삶을 마감했다.

“관용론”의 한 구절

(제11장 종교적 불관용이 불러온 불행한 결과들)

그렇다면 시민 개개인은 오직 자신의 이성의 소리에만 귀기울이고, 또한 자신의 이성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든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든 그 이성이 지시하는 것만 고려해도 될 것인가? 그렇다. 단,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을 믿거나 믿지 말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법과 관습을 존중해야 할 의무는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한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를 믿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지금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당신 스스로도 우리 선조인 초기 그리스도교들을 단죄하고 또 그들을 박해했다고 비난한 사람들을 정당화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제18장 불관용이 인간의 정의와 일치하는 경우들)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이 범죄가 아닌 경우라면 통치자에게는 그것을 벌할 권리가 없다.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은 그것이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해칠 때만 범죄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이 광신을 불어넣는다면 그때부터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 따라서 관용을 누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광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교과서 속 볼테르

(2009개정 “윤리와 사상” 56쪽)

볼테르는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공자와 유교에 관한 책을 읽고, 유교야말로 기적이나 형이상학적 담론에 근거를 두지 않은, 이성에 기초를 둔 자연법적 도덕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신과 교회의 권위, 그리고 절대 왕권에서 벗어나서 신적 질서 대신 자연적 질서를 탐구하고, 계시에 의한 신앙 대신 이성에 의거한 지식을 모색하던 볼테르에게 유교 사상과 민본 정치의 이념은 그가 목마르게 찾고 있던 진리 그 자체였다. 볼테르는 유교의 본질을 하늘을 공경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가르침으로 보고, 공자를 천하에 둘도 없는 사표(師表)라고 하였다. 볼테르는 그의 연구실에 공자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경배하였다고 한다.(이승환, “유교 담론의 지형학”)


(2009개정 “윤리와 사상” 215쪽)

파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볼테르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 두각을 드러냈다. 성인이 되어서는 비극과 시를 쓰며 유명해졌고, 자유사상가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프랑스 계몽기에 종교적 광신자들에 맞서서 투쟁하며 이름을 높이기도 했는데, 관용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가면서 종교적 불관용으로 희생당한 이들을 변호하였다. 죽은 뒤에는 프랑스를 빛낸 인물을 기리는 사당인 ‘판테옹’에 묻혔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라는 말은 볼테르의 관용 정신을 잘 표현해 준다.


국내 번역된 대표 저서

-“관용론”(송기형 옮김, 한길사, 2001)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봉지 옮김, 열린책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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