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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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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독립 협회 ( 獨立協會 )

1896년 7월에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 개화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며 조직한 정치·사회 단체이다.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문을 건립하였으며, 1898년에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고 시국에 대한 6개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황제에게 주청하는 등의 활동을 펴다가 1898년 12월 해산되었다.

열강의 이권 침탈과 독립신문 발간

아관 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조선 정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하였던 서재필이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서재필은 개혁적 관료 및 개화 지식인들과 함께 아관 파천으로 손상된 나라의 권위를 되찾고 대내외적으로 자주국임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서재필은 국민 계몽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내세우고, 세계 정세와 근대 국가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독립 협회 창립과 국민 계몽 운동

고종의 환궁 이전부터 외세 의존을 벗어나기 위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이 발간된 뒤 3개월 후 정부 관료, 개화파 지식인과 함께 독립 협회를 설립하였다.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 안경수 등 정부 관료들도 다수 참여하였다. 


독립 협회는 모금을 통해 청의 사신을 맞던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건립하려고 하였으며, 독립문 건립을 위한 기금만 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차츰 교사, 학생 각계각층의 사람이 모금 운동에 동참하여, 전 국민적인 단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독립 협회는 기관지인 ‘대조선 독립 협회 회보’를 간행하고 1897년 8월부터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의 주제는 민족 문화 발전, 산업 개발, 미신 타파, 신교육 진흥 등 계몽적인 성격을 띤 것이 많았다. 이 시기까지 독립 협회는 주로 토론을 통하여 자주 국권과 자강 개혁의 필요성을 계몽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계몽 운동으로 점차 국민의 근대적 정치의식이 향상되고,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도가 높아져 독립 협회는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독립 협회의 개혁 운동

1897년 대한 제국 수립을 전후로 러시아가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절영도의 석탄 기지를 요구하는 등 대한 제국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때부터 대중 집회, 상소를 통해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자주 국권 운동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는 자유 민권 운동에 나섰다. 독립 협회는 1898년 3월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탈을 규탄하면서 자주 국권 수호를 주장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부산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으며, 한·러 은행을 폐쇄하였다.  


△만민 공동회(민족 기록화)  만민 공동회는 종로에 연단을 만들고 신분과 나이의 구별 없이 누구나 연설을 할 수 있었다. 


1898년 중반 이후 독립 협회는 회장 윤치호를 중심으로 내정 개혁 운동의 관심을 돌려 만민 공동회에서 정치,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독립 협회는 백동화를 남발하여 물가 폭등의 원인을 제공한 황제의 측근 이용익의 퇴진을 요구하였으며, 보수적 대신들의 사임을 촉구하였다. 고종은 독립 협회의 뜻을 수용하여 박정양 등 개혁적 관료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독립 협회는 관민 공동회도 열었다. 관민 공동회는 기존의 만민 공동회에 박정양을 비롯한 진보적인 대신들이 참여한 것이다. 여기에서 국권의 수호와 민권 보장 및 국정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관민 공동회의 건의에 따라 고종 황제는 새로운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였다. 그 결과 중추원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회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독립 협회의 해산

독립 협회는 중추원을 통해 황제와 의정부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여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중추원 신관제에 따라 독립 협회와 박정양 내각이 합심하여 내각을 개혁하는데 위협을 느낀 조병식 등 수구파 관료들은, 독립 협회가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뽑아 왕정을 공화정으로 바꾸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고종 황제는 독립 협회가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할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함께 독립 협회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독립 협회의 해산을 명령하고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황제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만민 공동회는 계속 상소를 올리며 독립 협회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측근 관료로 하여금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를 습격하게 하였다.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해 만민 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1898. 12.). 이로써 독립 협회가 추진하였던 개혁 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독립 협회의 의의와 한계

독립 협회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하여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다. 또한 민중 계몽을 통해 자유 민권을 신장시킴으로써 자강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민중에 기초한 사회 전반의 근대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독립 협회의 활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운동이자 민중들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독립 협회의 외세 배척 운동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는 적극적이었지만, 미국이나 영국, 일본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고 관대한 면이 있었다. 또한 제국주의 열강과의 교류를 강화하고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역점을 둔 나머지, 그들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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