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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나눔 · 소통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임오군란 ( 壬午軍亂)

1882년 서울에서 1882년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일본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으킨 군란이다. 1882년이 60간지로 임오년이기 때문에 임오군란이라 부른다.

임오군란의 배경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며 정권을 잡은 민씨 세력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개항한 이래 통리기무아문 설치, 총리대신 신설, 별기군 창설 등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흥선 대원군은 운현궁에 은거하며 호시탐탐 재집권을 노리면서 이러한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의 여론을 모으고 있었다.

 

당시 서울의 하급 군인들은 대부분 서울의 빈민층 가운데서 충당되었는데, 다른 빈민층과 마찬가지로 낮은 급료 때문에 대부분 적은 자본으로 수공업 상업을 하거나 도기 근교에 야채를 재배해서 팔거나 막노동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서울의 빈민층은 도성 내의 빈민촌이나 교외, 한강 연안 지역의 변두리 마를 등에 촌락을 형성하고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는데, 왕십리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이들 빈민은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군인들도 별기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에 불만을 품었으며,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자 불만이 한층 높아졌다.


임오군란의 전개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5일) 병조판서를 겸하던 선혜청 당상 민겸호가 선혜청의 곡식으로 일단 한 달치 봉급을 주도록 명하였다. 이에 구식 군인들이 봉급을 받기 위해 선혜청으로 몰려갔는데 민겸호가 곡식을 착복하기 위해 쌀을 빼돌리고 겨와 모래를 섞었으므로 구식 군인들은 격분하여 봉급을 나눠주던 선혜청의 관리와 민겸호의 하인들을 구타하였다.


이 사건은 하급 군인과 서울 빈민층의 민씨 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보고되자, 그는 즉시 구식 군인 가운데 주동자 4명을 잡아들여 포도청에 가두었다. 이들이 사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훈련도감 하급 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왕십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민겸호에게 붙잡혀간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등소(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호소함)가 실패하자, 구식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무력 행사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동별영 창고를 열어 각종 무기를 꺼내 무장하고 포도청을 습격하여 붙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고, 의금부로 가서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별기군 훈련장을 습격하여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를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하급 군인과 빈민들이 합세해 대규모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를 살해하고 민 왕후를 찾기 위해 사방을 수색하였다. 이때 왕후는 홍계훈이 왕후를 자신의 누이라 속이고 등에 업어 탈출시켰다.


군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구식 군인의 지지를 받던 흥선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흥선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폐지하는 등 개화 정책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청이 군대를 파견하였고, 군란의 책임을 묻는다며 흥선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감으로써 임오군란은 끝을 맺었다.








한비이행도(*)

한비이행도는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청나라 병사의 등에 업혀 피난 가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조선 왕실을 비하하여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킨 대표적인 그림이다.



임오군란의 영향

임오군란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민중이 정부의 그릇된 개화 정책과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후 ,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였다. 그리고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맺어 청 상인이 조선의 개항장뿐만 아니라 내륙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는 청에 대한 입장 차이로 서로 대립하였다.

 

한편, 일본은 공사관을 습격 받은 일을 구실삼아 조선 정부와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일본 공사관에 일본군이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박영효는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밝히기 위해 태극기를 만들어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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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진은 독립기념관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독립기념관, 제68주년 광복절 특별기획전 개최'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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