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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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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남북 적십자 회담 ( 南北赤十字會談)

남북 간의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한과 북한의 적십자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회담이다. 제1차 본회담은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열렸고, 그 후 서울과 평양을 회담 장소로 1985년 12월 4일까지 10차례의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1971년 8월 12일 대한 적십자사 총재가 특별 성명을 발표하고 이산가족들의 인간적 고통을 덜어주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재결합을 주선해 주기 위해 남북 적십자 회담을 개최할 것을 북한 적십자사에 제의하였다. 이틀 뒤 북한 적십자사가 이 제의를 수락하는 의사를 전달하면서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까지 포함하여 이들의 자유 왕래를 실현시키자고 하였다.


1971년 8월 20일 분단 후 처음으로판문점 중립국 감독 위원회 회의실에서 남북 적십자 간의 첫 파견원 접촉이 이루어졌다.5차에 걸친 파견원 접촉에 의해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개최 준비가 완결되어 9월 20일 예비회담을 갖기로 하였다. 이에 떠라 1972년 8월 11일까지 25차의 예비회담과 16차의 실무 회의를 통해 본회담의 일시, 장소, 의제, 대표단 구성, 진행 절차 등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고 예비회담은 막을 내렸다.


 △ 남북 적십자 제1차 본회담(1972. 8. 30.)


남북 적십자 본회담은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모두 7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마침내 1972년 8월 30일부터 제1차 본회담이 평양에서 개막되었다. 이어 9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2차 회담에서 2개 항의 합의 문서를 가각 서면 교환하였고, 제3차 회담부터 의제에 대한 토의를 진행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회담은 북측과 남측 간에 상호 접촉의 대상자 및 제약 조건에 이견을 보임에 따라 1973년 7월 1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본회담을 끝으로 회담은 별 성과 없이 표류하다가 북한 측의 대화 중단 선언과 함께 단절되었다.

 

이후 12년 만인 1985년 제8차 본회담을 서울에서 열고 남북한 이산가족 등의 교환 방문 추진에 합의하였다. 양측 실무 대표는 세 차례의 접촉 끝에, 8월 22일 쌍방 각기 151명(단장1, 고향 방문단50, 예술 공연단50, 기자30, 지원 인원20)의 교환 방문에 합의함으로써 분단 40여년 만에 서울-평양 동시 방문이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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