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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보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여군(女軍)이 6ㆍ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6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 '여자 의용군 교육대'로 발족됨으로써 창설되었다. 처음에는 제복이 없어 남자 군복을 입었다.
광복 직후 사회 혼란기에 정부는 중등교 이상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학생 간부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려 하였다. 이에 국방부는 ‘여자청년호국대지도자 훈련’(1949. 5. 19.~6. 9.)을 마친 32명을 대상으로 1949년 6월 30일부터 1개월 간 배속 장교 제1기 교육을 실시하였고, 이들은 그해 7월 30일자로 육군 예비역 소위로 임관되었다. 이들은 곧 학도 호국단의 교관으로 배속되어 대한민국 여군의 효시가 되었다.
△1950년 대한민국 여군 9명: 정일권 대장이 훈시를 하는 장면이고, 옆의 대령은 김원일이다. 이들 여군의 훈련을 담당한 훈련대장이 바로 김현숙 초대 병과장이었다. 김현숙 당시 소령이 초대 교육대장에 취임과 동시에 1950년 10월 23일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편입되었고, 여자 배속 장교 출신 10명도 현역으로 편입되어 여군 교육을 담당하였다. <사진출처: 국방일보>
1950년 6·25 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지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무렵에 여성을 군에 흡수하는 정책을 마련하였다. 국방부 일반 명령 제58호를 근거로 1950년 9월 6일 여자 의용군 교육대가 발족되면서 여군 시대 개막을 알렸다.
당시 여자 의용군 지원 자격은 18세~25세의 미혼 여성으로 중학교(당시 6년제) 졸업 이상의 학력을 소지한 자였는데, 3000명의 지원자 중 491명이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제1기생 대부분은 학교 교사이거나 중학교 졸업자나 대학교 재학 중인 학생으로 당시는 엘리트 여성들이었다.
이렇게 배출된 여군은 후방 지역에서 주로 행정·경리·통신 분야에서 복무하였고, 일부는 전방 전투 사단에 배치되어 정보 수집, 수색 활동, 선무 활동에 참가하였다. 또한 특수 교육을 받은 일부는 적진에 투입되어 첩보 수집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6·25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서 여군의 역할이 줄어들어 1951년 11월 여자 의용군 훈련소는 해체되었다.
훈련소가 해체되고, 조직적이고 집약된 지휘 통수 기관으로 육군본부 고급 부관실 내에 여군과가 설치되자, 김현숙 당시 중령은 여군과장으로 영전하였다. 여군과의 출발과 함께 ‘여군’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게 되는데,‘의용군’에서 공식적으로 ‘여군’으로의 신분 전환이 이루어져 마침내 ‘여군’ 시대가 개막되었다. 여군과 창설과 함께 병과 휘장을 제정, 착용하게 되었다.
여군과는 1954년 1월 1일 육본 기구 개편에 따라 여군부로 승격되었고, 1959년 1월 1일 여군처로 개편되었는데, 이와 함께 김현숙 병과장도 여군부장을 거쳐 초대 여군처장에 임명되었다. 1955년 7월 10일 서울 서빙고에 여군훈련소가 재창설되었다.1967년 7월 14일에는 육군간호학교가 창설되어 여군 장교 양성에 기여하게 되었다. 한편, 여군에 관한 행정은 그동안 육군 본부 여군과에서 맡아 왔으나, 1970년 12월 육군 뷴부 직할 여군단이 창설되면서 독립병과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현재 우리나라 여군은 1974년부터 하사관 게급으로 모집되고 있으며, 행정·전산·공수특전·헌병·심리전·항공 관제·사진·체육 등의 분야에서 복무하고 있다. 1990년에는 여군과가 폐쇄되었고, 2월에 여군 학교가 창설되었다. 1991년 1월 1일 육군 여군단이 해체되고 인사 참모부 여군처로 승격되었다.
1997년 공군 사관 학교를 필두로 육군 및 해군 사관 학교가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2002년 첫 여성 장군 배출을 비롯하여 특전사와 해병대는 물론, 해군의 함정 군무와 전투 조종사도 탄생하였다.
<글 참조: 국방일보, 경향신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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