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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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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 (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 10. 2. ~ 1948. 1. 30. )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이자,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인도의 영국 식민지 기간 중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반영 독립운동과 무료 변호, 사탸그라하 등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도의 화폐인 루피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인의 자치”가 있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였다. 1922년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전 국민의 호칭이 되어 마하트마 간디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간디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후보에 4번이나 오르기도 하였다.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포르반다르는 오늘날 인도의 서부 구자라트 주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이다. 간디는 포르반다르의 총리였던 아버지와  힌두교 신앙심이 매우 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채식주의, 자기 정화와 단식, 그리고 모든 종파의 상호 관용을 배우며 자랐다. 당시 인도의 거의 전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고, 특히 간디가 태어난 지역은 이미 오래 전에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간디는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13세 때 동갑인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결혼하였다. 1887년 18세 때 인도 사밀러스 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888년 영국에서 유학하여 법률을 공부하고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가 되었다. 1893년 소송 사건을 의뢰받아 1년 계약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근무하게 된 간디는 그곳에 사는 인도인이 처한 현실과 차별 대우를 목격하고, 인도인의 지위와 인권을 보호하고자 결심하였다. 



간디와 아내 카스트루바이(1922): 간디는 어린 나이에 혼인하고 보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차츰 학교에서도 아내를 생각하는 등 정욕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디에게 평생 양심의 가책을 준 일이 생겼다. 간디는 아버지가 편찮아서 열심히 병 간호를 했는데, 어느 날 밤늦게 삼촌과 교대하여 아내를 보고 오는 사이에 아버지가 운명하셨다.
간디는 이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던 것을 평생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평생 성적 욕망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간디는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실천하며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불살생(아힘사)을 기본 사상으로 하는 이른바 ‘간디주의(반영 항쟁에 내건 비복종, 비협력, 비폭력주의적 무저항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 1년 계약이 끝나고 환송 잔치 자리에서 우연히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였다. 이후 정치 운동가로 변신한 간디는 '나탈 인도 국민 회의‘를 창설하고,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9월 1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의 옛 엠파이어 극장에 3,000명의 인도인들이 그들의 시민권, 주거와 입국, 상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아시아인 등록법에 저항하기 위해 모였다. 대중 집회가 끝난 뒤 간디가 그들의 비폭력 투쟁을 '비폭력 불복종 운동((Satyagraha)'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이 사탸그라하 운동의 탄생이었다. ‘사탸그라하’는 '진리에의 노력'이란 뜻의 산스크리트 어이다.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그로부터 8년 동안 계속되었고, 남아프리카의 여러 주로 퍼져 나갔다. 그때까지 그는 벌써 세 차례나 투옥되었다.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와 협상한 후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고, 1915년 귀국하였다. 1915년 이후 1918년까지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영국이 약속을 배반하고, 오히려 재판 없이도 인도인을 투옥할 수 있는 '로래트법'을 통과시켰다. 간디는 영국에 대해 영국 상품 불매, 납세 거부 등 비협조 운동을 전개하기로 선언하고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인도 각지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이 운동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동안 간디는 체포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나왔다. 1924년부터 1925까지 인도 국민 회의 의장이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인도인의 자력에 의한 농촌 구제를 역설하였다.

1929년 인도 국민 회의는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다. 간디는1930년 61세의 나이로 샤타그라하 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구금되었고, 석방된 후에도 계속된 활동으로 투옥과 석방이 반복되었다.  


  간디의 소금의 행진: 1930년 3월 12일 영국의 ‘소금세’ 신설에 항의하여 간디가 그의 지지자 78명과 함께 390 km 떨어진 아라비아 해안의 댄디 해안을 향해 소금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영국 정부가 인도인의 소금 생산을 금지하고 영국산 소금 40 kg당 1루피씩 세금을 부과하자 직접 소금을 만들기 위해 전통 염전을 향해 떠난 것이다. 24일째인 4월 6일 새벽에 단디 해안에 도착한 간디는 주전자에 바닷물을 담아 끓여 한 줌의 소금을 얻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구속되었지만, 소금세는 1년 후 폐지되었다.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영국에서 독립하였으나, 간디가 열망하던 종교를 뛰어넘는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키스탄이 이슬람 국가로 분리 독립한 것이다. 당시 종교 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자,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그는 1948년 1월 30일에 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힌두교 급진주의자 나투람 고두세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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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인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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