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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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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을미사변(명성 황후 시해 사건) ( 乙未事變)

1895년 음력 8월 20일(음력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하에 일본 낭인배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조선의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일본 세력 강화를 꾀했던 사건이다

을미사변의 배경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랴오둥 반도, 펑후 제도를 차지하였다. 일본의 랴오둥 반도 장악은 일찍부터 남만주로 세력을 확대하려던 러시아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랴오둥 반도의 반환을 요구하는 삼국 간섭을 단행하였다. 결국 일본은 삼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청에 랴오둥 반도를 돌려주었다.

 

삼국 간섭을 계기로 일본의 힘이 유럽 열강에 비해 약하다고 본 조선 정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 하였다. 이에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박영효가 실각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조선 정부는 민영환을 주미 전권 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친일계인 어윤중, 김가진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계 이범진을 등용하는 등 배일 정책을 더욱 추진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조선에서 약화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이노우에 대신에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를 주한 공사로 임명하였다.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왕비(명성 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고 방책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흥선 대원군을 가담시키고 미우라 등은 행동 대원으로 해산설이 나돌던 조선군 훈련대를 이용하였으며, 일본인 낭인, 일본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였다.



을미사변의 전개

조선 정부가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한 때는 1895년 10월 7일(음력 8월 18일)일 새벽 2시였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왕비 시해 예정일이었던 날보다 이틀 앞당겨 10월 8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공덕리 별장에 있던 흥선 대원군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하였고, 일행은 서대문에서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급보를 듣고 달려와 광화문 앞을 막아섰으나, 일본군의 집중 사격으로 죽었고, 왕궁을 호위하던 시위대도 일본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폭도들은 고종과 중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였다.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왕비의 침전에 난입하는 폭도들을 막아서다 칼을 맞아 죽었고,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이 일본군과 낭인배의 칼에 쓰러졌다.

 

폭도들은 옥호루에서 왕비를 무참하게 시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 시신을 얹어 놓고 불태운 뒤, 타고 남은 잔해는 연못에 버리고 일부는 묻어버리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다. 그날 아침 미우라 공사는 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궁하여, 왕비 시해를 훈련대와 흥선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로 몰고 가면서 왕비가 궁궐을 탈출한 것으로 꾸며 폐서인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10월 10일 왕비 민씨의 폐위 조칙을 위장 발표하였다.


을미사변의 결과

사건의 내막은 그날부터 밖으로 흘러 나왔다. 궁궐을 숙위하던 다이(미국인 예비역 장군)와 사바틴(러시아인 건축가), 현흥택, 궁녀, 의녀 등은 당시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여 여러 외교관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미국 공사 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 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하였다.

 

국제 여론으로부터 따가운 비난을 받게 되자 난처해진 일본은 사건 관련자를 형식적으로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일본인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로 압송하는 한편, 미우라 대신 고무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철수에 이어 이노우에를 왕실 위문사로 파견하여 사건에 관련된 훈련대를 해산하고 왕비 민씨를 복위시키는 데 동의하는 등 국제 여론의 비판을 피하려는 무마책을 썼다.

 

그러나 10월 12일 정동파들이 러시아와 미국인의 협조를 얻어 고종을 궁 밖으로 빼돌리려 한 춘생문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사건에 외국인들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자신들의 만행을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만행을 자행한 미우라 이하 폭도 48명을 증거불충분이란 명목으로 석방하였다.

 

한편,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왕비가 승하하였음을 발표하였으나, 일본인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 공사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국내외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단발령과 태양력 사용 등 을미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명성 황후 시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전국적인 반일 의병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성 황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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