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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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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헝가리 의거(헝가리 반소 항쟁)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자주와 자유화의 기치를 내건 대규모 반소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헝가리의 반소 자유화 운동은 소련군의 강경 진압으로 수천 명이 희생되고 20만 명이 국외로 망명하는 참담한 비극을 남긴 채 끝났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이 일시적이나마 동유럽권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헝가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해 7월, 철권 통치를 행사해온 라코시가 당 총서기로 물러나고 개혁주의자 임레 너지가 총리에 올랐다. 너지가 자유화 정책을 펼쳐 국민의 지지를 받자 라코시는 2년도 안 되어 너지를 우익편향이라는 이유로 해임하고, 다시 철권 통치를 휘둘렀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 시작되자, 동유럽 일부 국가에서 탈스탈린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자유민주주의 운동의 성격과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해 6월 폴란드에서 먼저 반소 봉기가 일어났다. 포즈난 시 식량 폭동으로 시작된 폴란드 반소 운동은 개혁파 민족 공산주의자인 고물카가 당 제1서기장에 선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반소 항쟁은 그때까지도 계속 강압 정치를 펴고 있던 헝가리 라코시 정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결국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학생과 지식인이 이끄는 대규모 반소 봉기가 일어났다. 소련군 철수, 너지 복귀, 자유 선거 등을 요구하는 10만 명의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한 것이 발단이었다. 시위가 터지자 헝가리 정부는 무마책으로 너지를 총리로 다시 임명하는 한편, 계엄령 선포와 소련군을 끌어들였다.

 

헝가리 시민들이 빼앗은 소련군 탱크 위에 올라가 헝가리 국기를 흔들고 있는 모습(1956)


소련군의 개입으로 시위대의 투쟁은 한층 격화되기 시작하였고, 부다페스트에서는 군인들까지 합세해 시위대의 무장을 도왔고, 소련군 탱크와 항공기를 공격하였다. 시민ㆍ헝가리군은 소련군을 상대로 헝가리 전역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펼치며 반소 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너지의 새 정부는 사태 수습을 위해 일당 독재 폐지와 자유 선거를 약속하고, 다른 정당들과 함께 연립 정권을 수립한 뒤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와 중립화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소련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다시 부다페스트를 유린하였고, 헝가리 전역을 장악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항의하면서 유엔의 개입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오히려 서방 측이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너지 수상을 축출하고 중도파인 카다르를 수상에 임명하고 강경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피신하였다가 신변 안전을 보장받고 대사관을 나왔다가 소련군에 납치되어 2년 뒤 체포되어 1958년 처형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동유럽의 민주화를 주도하였고, 1980년대 후반의 헝가리 민주화 운동의 결과 1989년 5월 헝가리는 서방 측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되어 있던 철조망 ,철의 커튼을 철거하고 국경을 개방하였다. 1989년 10월 23일에는 신헌법(헝가리 공화국 헌법)의 시행으로,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국호를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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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인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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