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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자유학년 · 창체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 David Livingstone: 1813~1873 )

영국의 선교사, 의사, 탐험가이다. 유럽 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암흑 대륙이라 불렸던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였다. 그는 빅토리아 폭포와 잠베지 강 등을 발견하였고, 노예 매매 실태를 폭로하여 노예 무역 금지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첨병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리빙스턴은 1813년 3월 19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가난하지만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 살 때부터 방직 공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도 야간 학교에 다니며 학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10대부터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는데, 1834년 중국에 의료 선교단을 파견한다는 계획을 들은 뒤 중국의 선교사를 포부로 삼고 실천에 옮겼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 그리스어, 의학, 신학 등을 공부하였다. 1838년 마침내 의사 자격증을 얻었고, 선교회로부터 선교사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840년 영국과 중국의 아편 전쟁 때문에 중국 선교사의 꿈은 좌절되었다.
이후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선교사 로버트 모펏 만난 뒤 아프리카를 자신이 선교할 적임지라고 확신하였다. 당시 아프리카는 ‘검은 대륙(Dark Continent)’이라 불렸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840년 11월 정식 선교사로 임명된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로 출발하여 1841년 3월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였다. 이로부터 15년간 리빙스턴은 계속해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이동하며,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전도하였다. 그리고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을 유럽인들이 여행할 수 있고 쉽게 정착할 수 있게 된다면, 전도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아프리카를 알리고자 아프리카 횡단을 결심하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1841년 7월 케이프타운을 떠나 1842년 여름에는 백인 출입이 통제된 아프리카 북쪽 내륙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곳 주민들의 언어, 생활양식, 지리상의 발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아프리카 생활을 계속하였고, 1845년 선교사 모펏의 딸과 결혼하여 아프리카 지역을 함께 여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아내의 건강 악화와 태어난 자녀들 교육 문제로 1852년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냈다.

가족이 영국으로 돌아간 후 리빙스턴은 자유롭게 아프리카 내륙 중부까지 탐험하며 전도하였다. 
1852년 케이프타운을 출발하여 육로로 오늘날 앙골라의 수도인 루안다에서부터 모잠비크의 켈리마네까지의 탐험에 성공하여, 아프리카 최초의 횡단에 성공하였다. 리빙스턴은 1855년 잠베지 강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폭포를 발견하였는데, 당시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이름 붙였다. 


1856년 귀국하여 그는 자신이 이룩한 성과들을 겸허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은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1857)”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7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을 출간한 뒤에는 6개월간 영국 곳곳을 다니며 강연을 하였다.

 

리빙스턴은 1858년 켈리마네 주재 영국 영사로 부임하여, 영국 정부의 원조를 얻어 중앙 아프리카 탐험 대장이 된 그는 니아사 호 등을 탐험하였다. 대원을 이끌고 잠베지 강 유역을 조사하던 중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노예 매매를 보고 이에 간섭하여 수백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과 영국 간에 분쟁이 생겨 영국 정부에서 리빙스턴에게 탐험 중지 명령을 내렸다. 리빙스턴은 1864년 다시 귀국하여 “잠베지 강과 그 지류(1865)”를 출판하였다.

 

리빙스턴은 1866년 영국 영사의 지위를 맡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대원들과 함께 동부 연안에서 내륙으로 진출하였고, 1871년 3월에는 북서부 마지막 목표 지점인 니앙궤에 도착하였다. 그는 나일 강의 수원지를 찾고 아프리카에서의 노예 무역을 폐지하겠다는 열정으로 선교와 탐험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1월 탕가니카 호 동쪽 기슭에 이르렀을 때 리빙스턴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었다.


리빙스턴은 그를 찾기 위해 파견된 뉴욕 헤럴드 특파원 스탠리의 수색대를 만나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리빙스턴은 함께 돌아가자는 스탠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 남아 탐험을 계속 하였다. 하지만 리빙스턴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873년 5월 1일 아프리카 하인이 그를 찾아냈을 때 침대 곁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은 채 죽어 있었다. 그의 시신은 미이라로 만들어진 뒤 잔지바르까지 운반되어 영국으로 옮겨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 사람에게는 조사가 필요 없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아멘)하다 살고 응답하다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잠비아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인 리빙스턴이 있으며, 지금도 그의 기념비와 그의 자료를 모은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얻은 아프리카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진정으로 아프리카를 사랑한 선교사이자 탐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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