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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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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민영환, 을사조약 규탄 자결 ( 閔泳煥, 1861~1905)

고종 황제를 호위하던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내용의 유서 3통을 남기고 45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861년 세도 정치기에 태어난 민영환은 선혜청 당상을 지낸 민겸호의 아들이며, 뒤에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민씨 정권의 세도 속에서 민영환은1878년 17세에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 정자, 수찬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과 도승지를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생부 민겸호가 피살되자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치렀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부윤을 지냈다.1895년 주미 전권 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명성 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민영환은 1896년 특명 전권 공사로  일본, 미국, 영국 등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뒤 귀국하였고, 이듬해에도 다시 유럽 6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그는 근대화된 외국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새로운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여러 제도 개혁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참정대신(현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나, 친일적 대신들과 대립하여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났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절단: 1896년 6월 민영환은 대한 제국 특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다(앞 중앙). 겉으론 니콜라이 2세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단이었지만, 민영환의 품속에는 ‘차관 300만 엔을 빌려 달라’는 고종의 친서가 들어 있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 파천 이후 조선 왕실은 일본 대신 러시아에 기대보려 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차관 요구를 거절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일의정서가 발효되자 민영환은 앞장서서 부당함을 격렬하게 성토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자 조병세 등 문무백관과 함께 을사조약에 서명한 5적을 처형할 것과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조병세의 체포로 무산되었고, 곧이어 2차 상소를 전개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5년 11월 30일 새벽, 
민영환은 청지기 이완식의 집(현재 종로구 공평동 공평빌딩 앞)에서  자결하였고,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외국 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으며, 또 다른 한 통은 고종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순국 후 이듬해 자결할 때 입었던 피묻은 의복이 있던 자리에 대나무가 솟았는데,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혈죽이라 하였다고 한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 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 후하게 예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최고 관작이 추증되었으며, 의절의 정문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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