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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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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12·12 사태

1979년 12월 12일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전두환, 노태우)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 내부의 무력 충돌 사건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 수사는 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서 추진하였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육군 대장이었고,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전두환 육군 소장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태를 수사했지만, 10·26 사태 당시 정승화 총장이 현장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후 
정승화가 계엄 사령관에 취임하여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하는 등 내부 개혁이 진행되면서 정치 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사령관이 총리공관의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고, 정승화 총장 체포 안에 대한 재가를 요구했으나, 최규하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 시간에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하나회 중심의 군부 세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나회는 1964년에 전두환, 노태우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이다. 

연행 과정에서 양측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신군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를 연행함으로써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그날 밤 다시 신군부 세력이 대통령을 찾아가 정승화 총장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였지만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12·12 사태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에 육군 본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 하에 두고 서서히 정권 장악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리고 당시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 있던 육군 본부 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4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12·12 사태를 주도하였던 신군부 세력은 대부분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5월 중순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군사 쿠데타에 의한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5월 24일 김재규 등 10·26 사태 관련자는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즉결 심판으로 처형되었다. 그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하였고, 9월 1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회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12·12 사태는 주도 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하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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