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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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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김좌진 ( 金佐鎭; 1889~1930)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호는 백야(白冶)이다.

김좌진은 1889년 11월 24일(음력) 충청남도 홍성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1905년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였으며,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개화한다)는 뜻인 호명학교를 설립하였고,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창호,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 기관으로 오성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도 도왔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 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1913년 출소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에 가담하였고, 그해 8월 정의단이 군정부 조직으로 개편되자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 김좌진 시비(*)


12월 군정부가 북로군정서로 개칭하였고, 김좌진은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이어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으며,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1930년 1월 24일 주중청년협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으며, 한족총연합회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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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진은 독립기념관이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시어록비: 김좌진(金佐鎭 : 1889 ~ 1930)'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