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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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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제주 4·3 사건 ( 濟州四三事件)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 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제주도는 일제 강점기부터 좌익 계열 활동의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하였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 군정청과 협조적이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노동당(남로당) 계열의 좌익 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극우 반공 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 중 구경나온 어린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에 치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본 주민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이를 경찰에 대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들에게 총을 발포하면서 주민 6명이 목숨을 잃었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 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규정하여 행사 간부와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동참한 ‘3·10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후 미군정과 정부가 3·10 총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하면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도 내 경찰서와 관공서, 우익단체 등을 공격하는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희생되었다.

2000년 6월부터 시작된 사건 희생자 신고 접수 결과 집계된 희생자는 모두 1만 5000여 명이었고,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6 25 전쟁 이후 남북이 서로 대립하면서 희생자의 가족조차도 
제주 4·3 사건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제주 4·3 사건 명예 회복 위원회 회의


2000년 8월 발족된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의 진상 조사 결과, 정부는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 선거·단독 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건 희생자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제주 4·3 사건에 대한 추모 사업과 명예 회복 등에 대한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의 첫 공식 사과가 이루어졌다. 
제주 4·3 사건은 문학 작품과 드라마,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순이 삼촌”(현기영 중편 소설, 1978년), ‘여명의 눈동자’(1991년 드라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제주 4·3’(1999년 다큐멘터리), ‘야인 시대’(2003년 드라마),‘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2013년 영화, 감독:오멸)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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