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교과 설정

마이허브 > 교과에도 반영 됩니다.

  • 국어
  • 영어
  • 수학
  • 과학
  • 사회
  • 지리
  • 역사
  • 도덕
  • 기술·가정
  • 정보
  • 음악
  • 미술
  • 체육
  • 연극
  • 한문
닫기
닫기

사이트맵

닫기

중등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나눔 · 소통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백마고지 전투 ( 白馬高地 戰鬪)

6·25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인 1952년 10월 철원 북방의 395고지(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 사단이 중국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 전투이다.

백마고지는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km 지점에 있는 해발 395 m 고지로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고지라고도 한다. 이 일대는 6·25 전쟁 전까지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평범한 야산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1951년 7월 후전 협상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 일대에서 군사적 접촉이 계속되자 일약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고, 국군과 중국군은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51년 11월 초 휴전 회담에서 현 시점의 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 전선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철의 삼각 지대(철원, 김화, 평강)의 하나인 철원 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하였다. 따라서 적이 이곳을 차지하게 되면 국군의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초기에 낙관적이었던 휴전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1952년 중반에 접어들어 포로 협상이 타결점을 찾지 못하면서 휴전 회담과 전투가 동시에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비교적 전선이 안정된 서부와 동부 지역보다는 중부 지역의 연천-철원 북방의 역곡천 일대에서 유리한 지형 확보를 위한 고지 쟁탈전이 또 다시 불을 뿜었다. 당시 395고지는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 보병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 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 지정학상 요지로 중국 인민군과 국군 간의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국 인민군이 철원에 위치한 395고지를 불시에 공격하였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국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국군 제9 보병 사단은 10월 15일까지 3개 사단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인해전술을 감행하는 중국군과 밀고 말리는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제9 보병 사단은 10일 간의 전투에서 백마고지를 사이에 두고 12차례나 쟁탈전을 반복하였다. 고지의 주인이 바뀐 것도 7차례나 되었지만, 끝까지 고지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국군은 1만여 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국군 제9 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95고지는 격전을 치르고 난 후 심한 포격으로 고지의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하얗게 된 민둥산이 마치 백마기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이후부터  백마고지라 불렀다. 그리고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제9 보병 사단의 부대 명칭을 백마 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 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 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매년 10월 16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아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27
28
29
30
21

금주의 인물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