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의 역사

1. 사료 속의 독도

〔1〕울릉도와 독도의 역사적 인식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의 역사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울릉도에는 오랜 옛날부터 가까운 내륙 지방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문헌상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3세기에 나오기 시작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沃沮條)에 “옥저의 기로(耆老)가 말하기를 ‘국인이 언젠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일 동안 표류하다가 동쪽의 섬에 표착하였는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마다 7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동쪽의 섬’을 우산국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다른 견해도 있지만, 3세기경에 이미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삼국 시대 이전에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국이라 불리는 소규모 왕국이었음을 사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안 일대의 도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 왕국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서 우리 역사에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 영토로 존재해 왔다. “고려사”,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울릉도와 독도는 하나의 광역 지역으로서 우산도로 불리거나, 각각의 독자적인 섬으로서 우산과 무릉으로 불렸다. 또한 울릉도와 독도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내륙과의 연계 안에서 존재하여 왔고, 우리 어민들은 고기잡이를 하는 거점으로 줄곧 활용하여 왔다. 역사 안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본토와 섬의 관계에 놓여 있었고, 동일 역사・문화・생활 권역에 속해 있었다.


〔2〕독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

우리나라의 문헌에 독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1145)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라는 두 개의 섬이 우산국이라는 하나의 독립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본래 삼국 시대 이전에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국으로 불렸다.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512)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에 병합되었고, 이로써 울릉도의 주변 섬인 독도도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지증왕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이 항복하고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우산국은 명주(현재 강릉) 의 정동 쪽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1백리이다. 우산국 사람들이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자,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신라 시대 행정 구역-현재 강릉)의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성질이 사나워 위엄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려우니 꾀를 써서 복종시키는 것아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로 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는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복종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러놓아 밟혀 죽게 하겠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두려워서 바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 "삼국사기": 1145년(인종 23년)에 김부식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의 정사(正史)이다. 본기, 지(志), 표, 열전으로 이루어져 왕실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최초로 독도에 대해 기록하였다고 일본 정부가 지적한 일본 관찬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에는 울릉도와 함께 독도(우산도)가 고려의 영토라는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은주시청합기’는 돗토리 번의 관리인 사이토 호센이 번주의 지시에 따라 1667년 8월부터 약 2개월 동안 은주(현재 오키 섬)를 둘러보고 자신이 보고 들은 이 섬의 역사, 지리 등을 상세히 기록한 조사 보고서이다. 사이토 호센은 은주에서 서북 방향으로 독도가 있고,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은주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의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주는 북해 가운데 있는데, 은기도(隱岐島)라고 한다. 남쪽으로 운주의 미수관이 35리, 남동쪽으로 백기주의 적기표가 40리 떨어져 있다. 남서쪽으로 석주의 온천진이 58리 떨어져 있고, 북에서 동으로 연결되는 곳은 없다. 은주에서 서북쪽으로 이틀 낮과 사흘 밤을 가면 송도(松島: 독도)가 있고, 또 하루를 가면 죽도(竹島: 울릉도)가 있다. … 두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이곳에서 고려를 보는 것이 운주(현재 시마네 현 동부)에서 은기(오키 섬)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쪽 한계는 이 주(此州)로 한다.”

-“은주시청합기”-


▲ ‘은주시청합기’ 논쟁 부분: 표시된 곳의 ‘以此州爲限矣(그런즉 일본의 서북쪽 한계는 이 주로 한다.)’가 한·일 간에 주요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차주(此州)’가 울릉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키 섬을 말하는 지에 대한 논쟁이다. 일본 정부는 1954년 한국 정부에 보낸 외교 문서를 통해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此州’는 현재의 오키 섬이며,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오키 섬이다.


〔3〕고려 시대의 울릉도와 독도 통치

고려 건국 이후에도 우산국은 신라에 이어 고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930년(태조 13년) 우산국에서 백길과 토두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 왕에게 토산물을 바쳤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백길과 토두에게 관직을 내려주었다.” 라고 하여 울릉도에서 온 사절에게 직위를 주어 울릉도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산국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우산국(于山國) 또는 우릉성(羽陵城)으로 불리면서, 고려의 동해안 외곽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며 본토와 지속적인 문물 교류를 통해 번성해 갔다.

1018년(현종 9년)에는 두만강 하류 동북 지방에 살던 동북 여진족이 우산국을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농토가 황폐화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즉시 우산국에 관리를 파견하여 농기구 및 종자 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여진족 침입 당시 본토로 피난하였던 우산국 주민들을 돌려보냈다. 이를 통해 고려가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의 주민과 영토를 계속 관리하였음은 물론, 여진족이 울릉도를 침입할 정도로 우산국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산국(于山國)이 동북 여진의 침입을 받아 농업이 황폐해졌으므로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구를 내려 주었다.
-"고려사"-







◀ “고려사” 권4 현종 9년 11월 병인 조: “고려사”는 조선 세종 31년(1449년)에 편찬하여 문종 1년(1451년)에 완성된 책으로, 고려 시대의 역사 및 문화 등을 정리해 놓았다.

1157년(의종 11년)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자 명주도(강원도) 관리 김유립을 파견하여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켜 살 수 있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김유립은 울릉도를 조사하고 돌아와, 왕에게 울릉도는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보고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고려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자 여러 번 시도했으나 도중에 풍랑으로 인한 익사자가 많아지자 중단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 정부가 울릉도를 적극적으로 개발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울릉도는 주민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을 지니고 있는 데다 왜인들의 침입도 빈번하였으므로 중앙 정부는 울릉도에 가끔 안무사(백성의 어려움을 살피는 임시 관직)를 파견하여 섬을 관리하였다. 또한 울릉도가 우릉·무릉도로, 독도가 우산도로 나타나 있고,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다. 고려가 원의 지배 간섭하에 있던 1346년(충목왕 2년)에도 울릉도의 주민들이 고려에 입조한 기록이 있어 고려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조선의 울릉도와 독도 통치

① 조선 정부의 쇄환 정책(刷還政策)

쇄환 정책은 정부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섬에 살지 못하게 하고 이들을 육지로 돌려보내는 도서 정책을 말한다. 울릉도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울릉도와 주변 섬에 관한 보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로서는 주민들이 울릉도에 들어가 사는 일을 방관할 수 없었다. 울릉도 주민은 왜구의 약탈 대상이 되기 쉬웠고, 울릉도를 침입한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강원도 등을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당시 울릉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세금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기 연근해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왜구 등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이 강구되면서 읍을 설치하거나 진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울릉도도 그 연장선상에서 설읍(設邑)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울릉도에 들어간 사람들이 피역(避役)의 무리이므로 그곳에 읍을 설치한다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그들을 다시 본토로 이주시키는 쇄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로 인해 울릉도가 일시적으로 무인도가 되었지만, 이는 정부가 울릉도와 주변 섬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일 뿐으로 영토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강원도 울진현의 속도(屬島)로서 강원 감사의 지휘 통제권에 있었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는 어디까지나 쇄환 조치 내지 순심 정책의 틀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군현 단위는 결코 아니었고, 호적에 군현민이 기록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울릉도 등의 섬에는 정부의 쇄환 정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어갔으므로 섬이 비어 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군역을 피해 도망간 범법자들이란 인식하에 쇄환의 대상이었다.

조선 정부는 울릉도 등의 섬을 관리하기 위해 별도의 관리인 무릉도순심경차관(茂陵島巡審敬差官), 무릉등처 안무사(武陵等處按撫使) 또는 우산·무릉등처 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를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정부는 2년마다 수토관(울릉도와 주변 섬을 수색하여 주민들을 찾아내 육지로 돌려보내는 관리)을 파견하여 수토 정책(搜討政策을 제도화하였다. 이들의 파견은 울릉도 등의 섬에 입도한 어민들의 쇄환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에게 울릉도 등의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인식시키려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② 조선 전기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

조선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관련된 기록이 많이 보인다. 조선 초기에 정부는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세종의 명으로 맹사성, 권진, 윤회 등이 완성한 “신찬팔도지리지”를 수정·보완하여 1454년(단종2년)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부록으로 넣은 것이다. 모두 8책으로 전국 328개의 군현(郡縣)에 관한 인문지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권153의 강원도 울진현 조에 우산도(독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는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하게 밝힌 최초의 문헌으로, 이를 통해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이 별개의 섬이라는 점과 맑은 날에 보인다는 것으로 보아 동해상에 울릉도와 독도가 있으며, 이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우산과 무릉 두 섬은 현(울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우산, 무릉 두 섬은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







◀ “세종실록” 지리지: 조선 8도의 각 지역에 대해 경제, 군사, 사회, 산업, 지방 제도 등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고려 시대에는 울릉도를 주로 무릉도라고 불렀으므로 “세종실록” 기록에 언급된 다른 하나의 섬인 우산도는 독도이다. 일본은 우산을 울릉도 옆에 자리 잡은 죽도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관음도는 울릉도 끝부분(섬목)에 가까이 있는 섬이고, 죽도는 울릉도 북동쪽으로 4㎞, 배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섬으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죽도는 대나무가 많아 대섬이라고 불렸는데, 한자로는 竹島(죽도)로 표기한다. 그런데 이 섬들은 맑은 날이 아니더라도 울릉도의 어느 방향에서나 잘 보인다. 그러므로 “세종실록” 지리지의 두 섬은 관음도나 죽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독도를 중요한 섬으로 인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어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울릉도와 독도의 두 섬에 대해 언급하였다. 울릉과 우산 두 개의 섬이 서로 다른 섬이나, 우산·울릉이 본래 하나의 섬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내용을 수록하여 우산도와 울릉도가 두 개의 다른 섬이지만 같은 섬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로써 우산도와 울릉도를 두 개의 다른 섬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 (울진)현 바로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세 봉우리가 높이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날씨가 맑으면 봉우리 꼭대기의 수목과 산 아래 모래들을 또렷이 볼 수 있다. 바람이 좋으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한 섬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중종 25)에 왕명에 의하여 이행, 윤은보 등이 펴낸 인문 지리서이다. 전국을 도·군별로 조목에 따라 서술하였으며, 지방 사회의 연혁, 성씨, 묘사(廟社), 풍속, 관부(官府), 토산, 인물 등 모든 면에 걸쳐 실은 백과사전식 서적이다.

③ 조선 후기 울릉도와 독도 관할

우산도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안용복 사건’을 전후해서이다. 조선 숙종 시대의 문신 박세당은 ‘울릉도’에서 우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우산도는 울릉도 가까이 있는 죽도나 관음도가 아니라 독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대개 두 섬이 여기(평해)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한 번 큰 바람이 불면 이를 수 있는 정도이다.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가장 높은 곳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 울릉도가 조금 더 높아 풍랑이 잦아지면 (육지에서) 대체로 볼 수 있다. "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신경준이 지은 “강계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우산도가 일본이 말하는 송도(마쓰시마)라고 하여 우산도가 독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두 섬 모두 우산국에 속한다고 한 것은 두 섬 모두 조선 영토임을 의미한다.

" 내가 살펴보니, 여지지에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한 섬이라고 하나 도지(圖志)라고 했으니 대체로 두 섬은 모두 우산국이다. "

또한 1770년 영조 때 편찬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에는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바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 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을 실어 우산도=마쓰시마=독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내용은 1808년의 “만기요람”과 1908년의 “증보문헌비고”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 참고자료: 동북아역사재단, 국토지리정보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