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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영왕, 의민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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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순종 황제의 이복 동생으로 휘는 이은이다. 1900년 영왕(英王),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의민이다.

 영친왕() 이은은 1897년 고종과 엄 귀비 사이에서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황태자 척(순종)과 장귀인 소생의 의친왕을 형으로 두었다. 1900년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로 정해졌다. 하지만 그해 12월 11살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이는 명목상 유학이었고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고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되면서 황태제에서 왕세제로 격하되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6년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약혼하였다. 영친왕은 이미 10여 년 전에 민영돈의 딸 민갑완과 약혼하여 예물까지 교환하였지만, 일제에 의해 1916년 1월 강제 파혼이 결정되었다. 영친왕은 1920년 마사코와 결혼식을 올렸고, 1921년 장남 이진이 출생했으나 다음해 사망하였으며, 1931년 둘째 아들 이구가 태어났다. 한편, 영친왕과 약혼하였던 민갑완은 평생 독신녀로 살았다고 한다.


1926년 순종 황제가 승하한 후, 영친왕은 형식상으로 이왕의 지위를 계승하였지만,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하였다. 영친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보병 59연대의 연대장, 사단장을 역임한 후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제1 항공군 사령관을 지내는 등 일본 군인의 신분으로 살았다. 그러나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영친왕의 왕족 지위는 박탈되어, 영친왕과 영친왕비는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무국적자 생활을 하며 경제적으로도 힘든 삶을 보냈다.


1920년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린 모습


노년의 영친왕 부부


1960년 4·19 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우리 정부에서는 영친왕에서 돌아오기를 권유하였다. 또한 구황실 사무국과 환국추진위원회 등이 나서서 각종 편지보내기와 서명 운동을 벌여 그의 환국을 촉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정권 때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마사코) 여사와 함께 56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환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에는 오랫동안 숙원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딴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그는 이후 7년 동안이나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70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고, 5월 9일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사후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며 영왕기념사업회, 자혜학교,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여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시호는 의민이며,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습니다. 이방자 여사도 1989년 4월 30일 그곳에 묻혔다.


영친왕 이은의 장례식 모습(1970. 5. 9.)


확인문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          )이고, 마지막 황태자는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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