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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스티븐스는 미국인으로 워싱턴 주재 일본 공사관의 촉탁으로 있다가, 러·일 전쟁 중인 1904년 일제가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고 고문 정치를 자행하면서, 대한 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스티븐스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수행하며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그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에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시키고 국제 여론을 긍정적으로 조성하도록 하였다.
1908년 3월 이토의 지시를 받고 휴가 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스티븐스는 각 언론에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국화를 환영한다.”라는 내용의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이 3월 22일자 샌프란시스코 신문에 보도되자,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은 일제히 격분하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 왔다가 미주 본토로 들어온 노동자와 몇 명의 유학생, 우국 망명자 등 150명 내외가 공립 협회와 대동보국회를 설립하여 그들의 권익 신장과 조국 독립운동을 도모하고 있었다. 3월 22일 저녁 긴급히 공립 회관에서 두 단체를 중심으로 공동회를 개최하여 이학현, 문양목, 정재관, 최유석 등 대표단을 구성하여 항의하기로 결정하고, 스티븐스 숙소를 찾아가 성명서 내용 정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여전히 “한국에 이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큰 행복이요, 동양의 다행이다.”라는 망언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대표단은 그를 집단 구타한 후 돌아와 사건의 전말을 공동회에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명운과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 스티븐스가 워싱턴 행 대륙 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 오클랜드 페리 부두 선창으로 갈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거사 장소로 택하였다.
3월 23일 스티븐스가 오클랜드 역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전명운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발되자, 그에게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 이 와중에 도착한 장인환이 총탄 3발을 발사하여 첫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의 등과 허리에 명중하였다. 전명운과 장인환은 둘 다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는 같은 목적을 품고 왔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결국 스티븐스는 장인환의 총에 중상을 입고 이틀 후 사망하였다.
총을 맞은 전명운은 병원에 실려갔고, 장인환은 현장에서 즉시 미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전명운은 퇴원한 뒤 장인환의 공범자로 구속되었다. 대동보국회와 공립 협회는 동포들에게 재판 비용을 모금하고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 투쟁을 하였다. 재판 결과 전명운은 공범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장인환은 금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특별 감형을 받아 10년 후 가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그 이전까지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던 미주 지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해외의 항일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전명운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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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진은 독립기념관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시어록비 '전명운(田明雲 : 1884 ∼ 1947)'을 이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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