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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자유학년 · 창체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형평 운동 ( 衡平運動)

1923년 형평사를 중심으로 천민들의 계급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전개한 신분 해방 운동이다. 형평은 백정들이 사용한 저울을 뜻하는 것으로, 저울(衡)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 1990년대 이전 피혁업에 종사하던 백정(*)


백정이란 명칭은 고려 시대에 관직이나 일정한 직업 없이 주로 농사를 짓던 일반 백성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도살업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 계층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엇습니다.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의 신분 철폐에 따라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지만,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백정들은 아무리 부자라도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상투를 올리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하였습니다. 결혼식에는 말이나 가마 대신 소와 널판지를 이용히였으며, 장례 때에도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나 교회에서도 함께 수업을 받거니 예배를 볼 수 없었고, 상인들과 떨어져 집단으로 거주하였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호적(민적)에 도한(屠漢)으로 기재되어 입학 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 신분이 표시되었습니다. 이처럼 
백정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각종 차별을 받았습니다.

 

백정들 중에는 경제력이 탄탄한 이들도 많았으며, 경제력이 뒷받침되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도 높았습니다. 부유한 백정 이학찬은 아들을 공립학교에 여러 번 입학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야학교와 사립학교에서도 거절당하였습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이학찬은 당시 양반 출신 선각자 강상호와 조선일보 지국장을 하던 신현수를 찾아가 울분을 토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멸시와 차별 대우에 시달리던 백정들과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 일부 양반 70여 명이 모여 1923년 4월 25일 조선 형평사를 조직하여 형평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형평 운동의 창립 목적은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고자 함이 우리의 주지이다."라는 취지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형평 운동은 언론과 사회주의 운동 진영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진주에 본사를 둔 조선 형평사는 12개 지사와 67개의 분사를 거느리는 조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형평 운동은 많은 시련에 부딪히기도 하였습니다. 그중 하나는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반 농민들의 거부감에서 오는 반(反)형평 운동이었습니다. 이들은 형평사의 사무소를 습격하거나 형평사 회원들이 판매하는 고기 불매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조직 내부 분란으로, 본부를 서울과 진주 중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부분, 그리고 온건파와 급진파의 의견 대립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형평 운동이 인권 운동의 차원을 넘어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 속에서 다른 사회 운동과 제휴하여 전개됨에 따라 일제의 탄압이 심해졌습니다.


형평 운동의 성과로 1930년대 초 관청의 호적이나 학적부에 기록되었던 백정 신분 표시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고, 백정 자녀들의 학교 입학도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형평사는 1931년 형평사 해소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거쳐, 결국 1935년 대동사로 개칭되면서 일제에 타협적인 융화주의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일제 강점기 민족 해방 운동 전선에서 부문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잃어 갔습니다. 


하지만 형평 운동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인권 운동인 동시에 다른 사회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진행된 민족 해방 운동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에 1996년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의 날’에 영원한 평등과 자유 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진주성 촉석문(동쪽에 있는 문) 앞에 기념탑이 세워졌습니다. 이 기념탑은 진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 1500여 명의 후원으로 세워졌으며, 차이로 인한 차별을 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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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진은 독립기념관이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보도자료 '일제하의 사회운동 사진전시회 개최'를 이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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