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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자유학년 · 창체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20여 개 국가가 직간접으로 참여한 냉전 시대 최대 규모의 국제전이었다.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미망인, 전쟁고아,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굳어지는 과정에서 미국의 국무 장관이었던 애치슨이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 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위선상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다(1950. 1.) .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면적인 남침을 시작하였다. 우세한 화력의 북한군에 밀려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수원, 대전을 거쳐 부산가지 피란길에 올랐다.


△폭파된 한강 철교(1950. 9. 23.) 영등포와 서울 시가를 잇는 한강 철교가 폭파되었다. 미 제1 해병사단의 한 병사가

한강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북한의 남침에 유엔에서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소집되어, 한국을 지원하는 유엔군 참전을 결정하였다. 이에 미국을 주축으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창설되어 한국에 파견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에게 넘겼다.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반격을 시도하였다.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 아래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에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국군이 북한군을 돕기 위해 전쟁에 개입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남하하였다. 1951년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인해 전술과 추위로 전면적인 후퇴를 하였고, 다시 서울을 내주었다. 이를 1·4 후퇴라고 한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70여 일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후 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승부 없는 전쟁이 길어지자 세계 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과 소련은 휴전 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나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의 방식을 두고 회담은 2년간이나 지속되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38도선 부근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철원 평야를 두고 전개된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9일 동안 12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양측을 합쳐 1만 3,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면서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여 회담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결국 회담이 시작된 지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선 확정, 비무장 지대 설치, 군사 정전 위원회와 중립국 감시 위원단 설치 등을 합의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때에 결정된 휴전선이 지금까지 남과 북을 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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