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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고,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일제의 침략을 비난하였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의거 활동도 줄을 이었다.
을사조약 체결에 분노한 우리 민족은 여러 형태로 저항하였다.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성과 조약에 조인한 매국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도 조약의 무효와 각 지방의 조약 반대 운동을 알리는 글들을 싣고 반일 여론을 확산시켜 나갔다.
유생들과 전직·현직 관료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매국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을사5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주청하는 상소가 연이어지는 가운데 시종 무관장 민영환을 비롯하여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 전 참정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자결로써 국권 침탈의 울분을 토하였다.
서울 시내의 모든 상가는 철시를 단행하여 조약 체결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였으며, 각급 학교의 뜻있는 교사와 학생들도 동맹 휴학을 결행하고 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하였고,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교육과 실업 등에 걸친 실력의 양성을 통해 국권의 회복을 꾀하려는 자강 운동도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층 활발해져 대한 자강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들과 학교의 설립이 잇따르게 되었다.
나인영(나철), 오기호 등은 을사5적의 처단을 시도하였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혔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 제국의 고문으로 일본의 침략을 도운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안중근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다.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은?
•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하였다. •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철시하였다. • 고종 황제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
① 105인 사건
② 을사조약 체결
③ 일제의 독도 침탈
④ 고종 황제 강제 퇴위
⑤ 애국 계몽 운동의 전개
을사오적(乙巳五賊)
1905년 일제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승인한 5명의 대신이다.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가리킨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의 적극적인 반대도 있었지만, 결국 박제순과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을사조약 반대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드높은 가운데, 이들 오적에 대한 응징 시도도 빈번하였다. 이들은 한·일 병합 후에 모두 친일의 대가로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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