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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황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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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황후의 장례는 사후 즉시 치러지지 못하고 2년 2개월이 지난 897년 11월 22일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의 명에 의해 명성 황후로 추증된 후 치러졌다. 명성 황후의 복위와 국장은 고종이 황실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성대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그 장엄한 장례식에 대한 준비 과정이나 장례식 광경을 기록한 책이 바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이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은 청·일 전쟁의 종결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본격화된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이 조선을 무대로 폭발한 것이었다. 삼국 간섭 후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미우라 고로를 앞세워서 일명 ‘여우사냥’이라 불린 명성 황후 시해라는 작전을 실행하고 여러 사람들을 포섭하며 치밀하게 작전을 꾸몄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군과 낭인배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옥호루가 딸림)에 들이닥쳤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왕비의 침전에 난입하는 폭도들을 막아서다 칼을 맞아 죽었으며, 왕비도 그들의 칼날에 처참하게 시해되었고, 시신은 불태워졌다. 그리고 그날 아침 미우라 공사는 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궁하여,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게 하였다. 또한 이 사태를 훈련대의 궁궐 침입 사건으로 몰면서, 왕비가 궁궐을 탈출한 것으로 꾸며 폐서인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그날 밤 현장을 목격한 서양인들과 궁인 등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조선과 외국 공사관에 알려졌다. 
이후 국제 언론의 비난을 받게 된 일본 정부는 미우라 등 사건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고, 잠시 국제 여론의 비판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이듬해 석방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2년 뒤인 1, 명성황후의 국장이 거행되었다.

일본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명성 황후는 1895년 10월 복호(復號)되었다. 그해 12월 고종은 정식으로 왕비의 승하를 공표하고, 1897년(광무 1년) 명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시해된 지 2년이 넘은 1897년 11월 22일에야 국장이 치러지고, 청량리 밖 홍릉에 묻혔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에는 다시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최근(2013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지 않고 피신해 생존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과 영국의 외교 문서가 발견되었다. 학계에서는 이 문서들이 을미사변 이후 외교가의 풍문을 모았거나 일제의 역선전일 가능성도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명성황후 발인 반차도: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 8일 서거하였지만, 장례는 2년이 지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한 달 뒤에 이루어졌다.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후의 장례로 격상되어 진행된 명성 황후의 국장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에 기록되었고, ‘명성 황후 발인 반차도는 마지막 영면의 길로 이동하는 명성황후 국장 행렬을 표현하였다.



  • 관련교과서 : 금성 30쪽, 비상 28쪽 미래엔 25쪽, 천재교육 25쪽, 두산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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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부르는 명칭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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