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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애국단원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일본 국왕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을 꾀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봉창은 그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용산의 문창보통학교(현재 효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였다. 이봉창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반일의식과 독립사상에 대해 별다른 인식을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청년이었다. 이봉창은 1920년에 철도 견습생에서 정식 역부가 된 무렵부터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봉창은 처음에는 이러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의연하였으나, 차별받는 생활이 길어지면서 자포자기하고 술과 도박까지 하여 빚까지 지게 되었다. 이에 이봉창은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1924년 4월에 사직원을 냈다. 이봉창은 철도원을 그만 둔 후 1년 반 동안 별다른 직업 없이 지내다가, 1925년 11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에 도착한 이봉창은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는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노동자 생활을 하며, 일본인들의 한국인 차별에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차별받는 현실을 인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도 얻었다. 이처럼 이봉창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차별받는 조선인으로 살기 부끄러웠고, 누구보다도 대접받는 신일본인으로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봉창은 1928년 11월 일본 국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이 교토에서 거행되자, 일본인 친구와 함께 교토로 행렬을 구경하러 갔다가, 오직 한국인이란 이유로 9일간 아무 이유 없이 유치장에 구금당하는 사건을 겪었다. 이 무렵부터 이봉창은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식민지 한국인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반일 감정과 민족의식이 쌓여 갔다. 이후 이봉창은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살기도 하였지만, 한국인은 한국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거짓된 삶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봉창은 오사카에서 다시 일자리를 구할 무렵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임시 정부가 있어 여러 가지로 한국인들을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이봉창은 앞으로 떳떳하게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생각에서 상하이를 자신이 가야 할 최고의 적지(適地)로 생각하였다. 1930년 12월 상하이에 도착한 이봉창은 한 달 넘게 일자리를 찾았으나 실패하였다. 이봉창은 1931년 1월 상하이에서 수소문 끝에 임시 정부로 찾아갔다. 사람들은 처음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나타나 일본식 풍모에 일본어가 많이 섞인 말을 하자 일제의 밀정으로 의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진심은 알게 되었고, 김구의 신뢰를 얻었다.
◁이봉창의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고 쓰여 있다.
김구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후 일본 국왕의 암살을 자원하여 김구와 함께 1년 이내에 이를 실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장 거사 자금이 없었으므로 상하이의 일본인 인쇄소와 악기점 등에서 일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1931년 12월 11일, 재미동포로부터 자금이 도착한 데 이어 수류탄 2개를 입수함으로써 거사 준비가 마무리되자,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두 손에 수류탄을 들고 일본 국왕 히로히토를 처단할 것을 선서하였다.
수류탄과 거사 자금 300원을 지니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그러나 일제는 일본 국왕의 암살에 대비해 여러 대의 의전 마차를 준비했는데 이봉창이 던진 폭탄은 일본 국왕이 타지 않은 다른 마차에서 터지고, 다른 한 발은 불발이 되어 히로히토를 폭살하려는 의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봉창은 그 자리에서 품안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3번 부른 뒤 체포되었다. 이봉창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가운데 예심조차 거치지 않고 진행된 그해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이봉창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인 애국단의 일원으로 도쿄에서 일본 국왕 히로히토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인물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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