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은 을미사변 당시 명성 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던 조선인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에서 훈련대장을 역임하던 중 일본인 자객들과 함께 공모하여 명성 황후를 살해하였으며, 그 이후 일본으로 도망쳤다. 우범선은 1903년 고영근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그때 우장춘dms 6살이었다. 이후 우장춘은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우장춘은 1916년 4월 도쿄 제국 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하였고,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사 시험장 고원(雇員)으로 취직하였다. 공부를 계속하여 1936년 5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모교에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현존 종을 재료로 또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해 세계적으로 이 방면 연구의 새 길을 열었다. 우장춘은 이후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고, 농사 시험장에서 기수라는 직급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식 성명을 거부하면서 1937년 퇴직한 뒤, 교토에 있는 다키이 종묘 회사로 옮겨 초대 연구 농장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후 1947년 국내에서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1백만 엔이 모금되어 가족 생활비로 전달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를 창설하여 우장춘에게 연구소의 운영을 부탁하였고, 그는 1950년 귀국하였다. 그는 가족 생활비로 전달된 1백만 엔을 육종에 관한 서적, 실험용 기구, 한국에 심을 각종 종자를 사오는 데 모두 썼다. 그리고 당시 6·25 전쟁이 한참이었던 부산에 와서 그 나이에 군복무까지 하였다고 한다.
△ 우장춘 박사 중심으로 우량 종자 생산 현장(1957. 2. 28.)
귀국한 우장춘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완전히 자급할 수 있었고, 무균종서 생산으로 6·25 전쟁 이후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흔히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든 농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씨 없는 수박은 1943년 일본의 기하라 히토시가 개발하였다. 우장춘은 육종학 농업 신기술의 중요성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씨 없는 수박 종자를 직접 재배하여 한국에서 시연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우장춘은 1958년부터는 1년에 두 번씩 벼를 수확하는 ‘일식이수’ 연구에 몰입하다 몸이 쇠약해져 3차에 걸친 수술을 하였지만 1959년 8월 10일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 정부는 안익태 선생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하고,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사회장으로 유해는 수원에 있는 농촌 진흥청 구내의 여기산 자락에 안장하였다.
△우장춘 박사 장례식(1959. 8. 14.)
우장춘은 생의 마지막 9년 5개월 동안 제주 감귤의 종자와 재배 기술을 창작, 특정 바이러스에 취약해 한번 창궐하면 전멸하는 강원도 감자를 변형시켜 면역을 가진 작물로 탈바꿈 시키는 등 우리나라 농업 기술을 짧은 시간에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 농업 분야 독립을 이루어냈다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