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몽골족이 세운 원은 내부 분열과 한족의 저항으로 차츰 힘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여진족은 차츰 독립의 기세를 드러내며 자신의 세력권을 넓혀 갔다.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옛 영토를 수복하였으며, 원의 감시 기구인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다.
중국 한족은 곳곳에서 저항을 하였으며, 마침내 1368년 주원장이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명이라고 불렀다. 주원장의 세력은 원을 북쪽으로 내몰기 시작하였고, 1371년 대륙의 서부지역을 차지한데 이어 요동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명은 고려를 속국으로 대우하며 압박하였고, 말을 비롯하여 금과 은 등 끊임없이 공물을 요구하였다.
1388년 명은 공민왕이 회복한 옛 쌍성총관부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직할령으로 삼겠다고 고려에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우왕 대에 집권하였던 절대 권력자 이인임을 몰아내고, 최영과 이성계가 각각 시중, 수시중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 최고 권력자인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고 우왕의 동조를 이끌어냈다.
최영과 이성계는 철령위 반환을 놓고 서로 대립하였다. 최영은 요동을 정벌함으로써 명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이성계는 요동 정벌이 단행될 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만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라는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8도의 군사를 징집하고 세자와 왕족들을 한양성으로 보내고 우현보에게 도성 개경을 지키게 한 후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서 요동 정벌을 준비하였다. 1388년 4월(음력) 최영을 8도 통도사로, 조민수를 좌군 통도사로, 이성계를 우군 통도사로 임명하였다. 5월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원정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도착하였지만, 장마가 시작되어 강물이 불어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두 번이나 군대를 돌이키자고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휘하 장병의 절대적인 지지와 조민수의 동의를 얻어 회군을 단행하였다. 이들은 개경을 점령한 뒤 최영을 체포해서 유배시키고 우왕을 퇴위시켰다. 처음에는 종실 중에서 국왕을 택하려 했으나 조민수·이색의 주장으로 우왕의 아들 창왕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조민수가 이성계파의 탄핵으로 실각하고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창왕도 폐위당하고 공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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