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은 청나라에 모직물과 면화를 수출하고 청나라로부터 홍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청나라는 은을 받고 홍차를 팔았는데,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은이 영국에서 청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손실을 보고 있던 상황에서 돈을 벌기 위해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청나라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이로써 영국은 이익을 많이 챙겼지만, 청나라 사람들은 아편에 중독되어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임칙서는 황제의 명에 따라 백성들에게 아편 금지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 무렵, 술 취한 영국 군인이 청나라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영국이 청나라에게 범인을 넘기지 않고 가벼운 벌과 벌금만 내게 하자 화가 난 임칙서는 영국 사람들을 광저우 지역에서 모두 쫓아냈다. 1840년 영국은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고, 그해 6월 540개의 대포와 병사 4천여 명을 실은 함대를 이끌고 광저우로 쳐들어왔다. 이 전쟁을 ‘1차 아편 전쟁’이라고 한다.
1856년 10월, 광저우 항에서 청나라 관리들이 바다에 정박 중이던 애로호에 올라타 아편 밀수 혐의로 선원을 모두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영국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영국 배에 청나라 관리가 들어와서 선원을 끌고 가고, 영국 국기를 강제로 끌어내려 바다에 던진 일은 영국을 모독한 일이오. 모두 석방하고 국기 모욕에 대한 사과와 피해를 보상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소!”
하지만 당시 애로호에는 영국 국기가 걸려 있지 않았다. 청나라가 아편 밀수 혐의로 잡아온 선원을 풀어 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1857년 프랑스와 연합군을 조직하여 단숨에 광둥을 무너뜨린다. 이 전쟁을 ‘2차 아편 전쟁’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지고 만다. 게다가 청나라 수도인 베이징이 공격을 당해 황제의 정원이었던 원명원까지 파괴되었고, 결국 청나라는 영국 · 프랑스와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된다. 조약은 “외국 사신의 베이징 주재를 허락한다. 항구 열 군데를 개방한다. 외국 배의 양쯔 강 출입을 허락한다. 외국인의 내륙 여행 및 크리스트교 선교를 허락한다. 배상금을 지불한다. 아편 거래를 인정한다. 영국에게 주룽 반도를 내준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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